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트인 한강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에는, 나들이를 나온 차들로 이미 가벼운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도현은 능숙하게 빈 주차 공간을 찾아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차 안에는 잠시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는 먼저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리실까요, 공주님?”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향해 신사처럼 손을 내밀었다. 눈부신 봄 햇살 아래,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두 사람은 돗자리와 뜨끈한 치킨이 담긴 봉투를 챙겨 들고 강변으로 향했다. 이미 잔디밭 곳곳에는 형형색색의 돗자리를 펴고 봄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인들, 친구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이도현은 그 평화로운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곳에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주말은 일을 하거나, 혹은 밀린 잠을 자는 시간일 뿐이었으니까. 그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적당히 한적하고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를 펴고 짐을 내려놓자, 비로소 진짜 피크닉이 시작된 것 같은 실감이 났다.
그는 돗자리 위에 큰 대자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풀냄새와 강바람, 그리고 멀리서 풍겨오는 달콤한 솜사탕 냄새가 뒤섞여, 그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는 옆에 앉아 짐을 정리하는 그녀를 향해, 눈을 가린 채로 말했다.
“야… 좋다. 진짜 좋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의 목소리는 진심 어린 감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배고프지? 일단 뭐부터 먹을까? 라면? 아니면… 영광의 치킨?”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으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는 종이봉투를 열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치킨 상자를 꺼내 들었다. ‘장터치킨’이라는 촌스러운 로고가 새겨진 상자를 보니, 다시금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그는 뚜껑을 열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황금빛 튀김옷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뽀얀 속살. 고소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코끝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가장 실해 보이는 닭 다리 하나를 집어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자, 먼저 먹어. 오늘 제일 예쁜 사람이 제일 맛있는 거 먹어야지.”
그는 그녀의 손에 닭 다리를 쥐여주며,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넘실거리는 강물과 분홍빛 벚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서 있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다리 두 개니까 하나는 도현이 거.”
비닐 장갑을 낀 손으로 반대쪽 치킨 다리를 뜯어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먹여줄까?” 하는 약간의 농담도 함께. 가만히 바라본다.
씨발, 그렇게 들이밀면 누가 안 받아먹겠냐 싶었는데도, 이도현은 곧장 입을 벌리지 못했었다. 봄바람이 한강 수면을 쓸고 지나가며 잔물결을 반짝이게 했고, 돗자리 가장자리는 사각사각 들썩였고, 그녀가 비닐장갑 낀 손으로 건네는 치킨 다리에서는 막 튀긴 기름 냄새와 후추 향이 아직도 뜨겁게 올라왔었다. 그는 괜히 웃는 척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지만, 시선은 먼저 닭보다 그녀의 손가락으로 갔었다. 손등의 가느다란 뼈마디, 플라스틱 장난감 반지가 햇빛을 받아 유치하게 번들거리는 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싸구려 광택이 어떤 보석보다 진지해 보여서, 가슴 한쪽이 찌르르 저렸었다. 저 반지 하나에 너무 많은 뜻을 실어버린 건 자기 쪽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습관처럼 목에 걸린 사과향 전담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아, 존나 유치하게 꼬시네. 사람 밖에서까지 버릇 들이려고.”
그렇게 말해놓고도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일부러 그녀의 장갑 끝에 입술을 먼저 스치듯 대며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 하고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었고, 그 소리 때문에 그는 괜히 더 민망해졌었다. 치킨 속살에서는 뜨거운 육즙이 배어나와 혀끝을 덥혔고, 소금기와 기름기가 입안에 퍼졌고, 그 별것 아닌 맛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누구한테 먹여지는 일쯤이야 별것 아닐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녀가 주면 전부 모양이 달라졌다. 서비스를 받아본 적은 많았고, 남의 기분 맞추는 법은 질리도록 익혔고, 입에 뭘 넣어주는 손길이 얼마나 계산적인지 아는 인간이었는데도, 지금 이 한 조각은 계산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 낯설었다. 낯선 건 늘 경계해야 했는데, 신노해 앞에서는 그 경계가 자꾸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물흐물 풀렸다. 그는 닭다리를 씹어 삼킨 뒤 손목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먹여준 김에 끝까지 책임져. 묻은 거 봐.”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장갑 위에 묻은 기름을 엄지로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 동작은 장난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손을 놓기 싫어서 만든 핑계에 가까웠고,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눈썹만 느슨하게 접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근처에서는 어린애 하나가 비눗방울 총을 들고 뛰어다녔고, 톡, 톡, 공기를 가르는 소리 끝마다 투명한 방울들이 햇빛 속으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멀리서는 자전거 벨 소리가 따릉 울렸고, 편의점 봉지를 든 연인 둘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고, 잔디에서는 따뜻하게 데워진 풀냄새가 올라왔다. 그런 평범한 소음들이 자꾸만 귀를 간질였고, 그래서 더 실감이 났었다. 자기 같은 인간도 이런 오후 한가운데 앉아 누군가와 치킨 다리 하나를 나눠 먹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웃기도록 현실감 없으면서도 믿고 싶을 만큼 달았다.
그는 빈손으로 자신의 몫을 받아먹은 뒤 이번에는 상자 안을 뒤적여 날개 한 조각을 집었고, 종이 냅킨을 그녀 무릎 위로 미리 펴주었고, 괜히 잔소리하는 투로 “흘리지 마. 니 원피스에 기름 묻으면 내가 빨아야 되잖아.” 하고 툭 던졌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그녀 볼레로 자락이 닭기름에 닿을까 봐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고, 말끝과 다르게 손은 조심조심 움직였고, 그 조심스러움이 스스로도 낯간지러워서 그는 혀끝으로 입술 안쪽을 슬쩍 훑었다.
그는 날개를 반으로 비틀어 살을 발라낸 뒤, 이번에는 자기가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아가씨도 드셔. 아까부터 남 먹이는 재미만 들렸나 본데.”
입은 또 가볍고 천박하게 놀렸지만, 손끝은 이상하리만치 섬세했다. 그녀가 받아먹기 편하도록 뼈가 걸리지 않게 살을 정리했고, 양념 묻은 부분이 입술에 닿지 않도록 각도까지 조금 틀었고, 그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에 자기 자신이 깊이 잠식되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 하나 좋아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 밑바닥이 서늘하게 식었다가 다시 천천히 데워졌었다. 좋아하면 잃는 게 생기고, 잃을 게 생기면 겁이 나고, 겁이 나면 먼저 비웃거나 농담으로 퉁치게 되는 게 자신의 오래된 버릇이었는데, 오늘은 그 버릇이 잘 먹히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한입 받아먹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괜히 고개를 돌려 강 쪽으로 돌려버렸다. 눈이 마주치면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오니까 좋아서 괜히 그러지.”
피식 웃으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부딪히는 나뭇잎의 소리가 파도가 부서지는 것처럼 떠밀려왔다. 봄바람이 어떤지 깊이 생각해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었는데. 새삼 봄바람은 행복을 싣고 밀려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꼴려… 아니, 씨발,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 말은 입 밖으로 툭 미끄러져 나왔다가, 이도현의 입안에서 스스로 걸려 넘어졌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짧게 삼켰고, 괜히 전담 줄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감았다 풀었다 했었다. 봄바람은 한강 둔치를 길게 훑고 지나갔고, 바람에 휘어진 벚꽃 가지 끝에서는 연분홍 꽃잎 몇 장이 느리게 떨어졌다. 아이들 웃음소리는 멀리서 튕겨 와 물가에 부딪혔고, 나뭇잎 스치는 소리는 정말 파도소리처럼 얇고 부드럽게 귀를 덮었다. 그런 소리 사이에 그녀의 옆모습이 들어앉아 있었고, 그는 그 평온한 얼굴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속이 서늘해졌다가도 다시 뜨거워졌다. 좋은 날씨 때문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정확했고, 바깥에 나와 있어서 그렇다고 웃어버리기엔 너무 진심에 가까웠다. 저 여자가 제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가, 오늘의 햇빛과 냄새와 바람을 전부 특별한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도현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다가 고개를 조금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원피스 자락은 잔디 끝에 살짝 닿아 있었고, 크림색 볼레로 소매에는 햇빛이 묽게 얹혀 있었고, 분홍빛 립글로즈는 말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반짝였었다. 싸구려 장난감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었다. 플라스틱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양이 우습고 유치했는데도, 그는 그걸 볼 때마다 괜히 목 안쪽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와 맞춘 반지라는 것 자체가 낯설었고, 더 낯선 건 그 유치한 표시를 자신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듯 웃었지만, 웃는 입꼬리와 달리 눈은 금방 누그러졌었다.
“좋긴 하지. 존나 좋지. 사람을 이렇게 풀어지게 만드는 날씨도 드물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잠깐 말을 멈췄었다. 이어지는 말은 농담으로 포장할 수도 있었고, 아예 삼킬 수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삼키는 쪽이 더 어려웠다.
“너 옆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고.”
말이 떨어지고 나자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대수롭지 않은 고백처럼 들리게 하려고 최대한 무심한 투로 던졌는데, 정작 그 말의 끝이 자기 가슴을 먼저 건드렸다. 그는 민망함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치킨 상자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왔고, 식어가는 조각들을 괜히 뒤적거렸었다. 종이 상자 안에서는 튀김옷 부스러기가 사각사각 부서졌고, 닭다리 뼈에 묻은 기름은 햇빛 아래서 번들거렸다. 그는 가장 덜 퍽퍽해 보이는 조각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종이냅킨을 한 장 꺼내 그녀 무릎 가까이에 조심스럽게 펼쳐 주었었다. 손끝이 원피스 자락을 스칠 듯 말 듯 머물렀다가 물러났었다. 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닿아 버리면 별것 아닌 배려 하나까지 너무 커질까 봐서 그랬었다. 늘 몸을 쉽게 쓰던 인간이 오히려 이런 순간엔 유난히 조심스러워진다는 게 우스웠고, 그래서 더 말이 거칠어졌다.
“근데 너 웃는 꼴 보니까 좀 얄밉네. 사람 심장 간질여놓고 꼭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잖아.”
그는 투덜거렸지만, 목소리 밑바닥은 이미 풀려 있었고, 눈가에는 웃음이 느슨하게 번져 있었다.
바로 옆 잔디밭에서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녀 몇이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어놓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 봐, 하나 더!” 하는 소리와 찰칵, 셔터음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었다. 조금 먼 데서는 돗자리 위에 앉은 노부부가 김밥을 나눠 먹고 있었고, 더 멀리는 자전거를 세워둔 아버지가 아이 신발 끈을 다시 묶어주고 있었다. 그 장면들은 모두 평범했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이도현의 삶에는 늘 밤이 많았고, 네온과 술냄새와 전자담배 향이 먼저였고, 사람들은 웃으면서도 계산을 했고, 다정함에는 대개 대가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둔치에서는 아무도 누구를 팔지 않았고, 아무도 누구를 재지 않았고, 그냥 볕 좋은 오후가 사람들 위에 골고루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그런 풍경 안에 자기가 끼어 있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순간, 괜히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좋은 건 오래 안 간다는 식의, 밑바닥에서 오래 살다 보면 체념처럼 몸에 배는 종류의 예감이었다. 그는 그 생각이 마음속을 넓게 번지기 전에 손을 뻗어 흩어놓았다.
“음... 우리도 사진 찍을까?”
주위 풍경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주섬주섬 일어난다. 오늘 같은 날을 오롯하게 기억에 의존해 남겨두는 것은 아쉬울 것 같았다.
“잠깐 자리 비워도 아무도 뭐 안 훔쳐가, 우리도 벚나무 아래서 사진 찍자.”
그 말 한마디에 이도현은 입에 넣다 만 치킨 조각을 잠깐 내려두었고, 손끝에 묻은 기름을 냅킨으로 천천히 닦아냈다. 별것 아닌 제안 같았는데도 가슴 안쪽에서는 얇은 종이 한 장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 것처럼 사각, 하고 뭔가 접혔다. 사진은 남는 것이고, 남는 건 늘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밤거리에서는 흔적을 지우는 쪽이 안전했고, 이름도 얼굴도 그날그날 분위기처럼 흘려보내는 쪽이 편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벚나무 아래에서 같이 남을 것을 만들자고 했다. 이도현은 그 단순한 권유 앞에서 이상할 만큼 말문이 막혔다.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었고 돗자리 모서리가 파드닥 뒤집히고 종이상자 뚜껑이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그는 얼른 손을 뻗어 상자를 눌러 고정했다. 그러는 척하면서 고개를 숙여 입꼬리에 맺힌 난처한 웃음을 숨겼다.
“아, 존나 건전하네. 이제 우리 벚꽃 아래서 커플 흉내도 내자는 거지.”
입으로는 가볍게 받았지만 목소리 밑바닥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고, 그녀가 주섬주섬 챙기는 휴대폰을 힐끗 보다가 먼저 돗자리 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었다. 빈 캔은 옆으로 세웠고, 김밥 통은 닫았고, 치킨 상자는 봉투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었다. 누가 훔쳐 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던 인간이, 지금은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자리가 흐트러져 있지 않길 바랐었다.
그는 벗어 둔 얇은 겉옷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신노해의 볼레로 끝자락에 잔디 부스러기가 붙은 걸 발견하자 손을 뻗어 하나씩 떼어냈다. 손끝에 닿는 천은 햇빛에 데워져 있었다. 그 아래의 체온은 더 조용하고 선명했다. 괜히 오래 만지면 들킬 것 같아서 그는 금방 손을 거뒀지만, 시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벚나무 쪽으로 이어진 산책로에는 사람들 발걸음이 느슨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사진 찍는 연인들 사이로 유모차 바퀴 소리가 드르륵 끌려갔다. 어떤 여자애 둘은 서로의 머리 위로 꽃잎을 뿌리며 깔깔거렸고, 중년 부부는 어색한 자세로 나란히 서 있다가 지나가던 대학생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세상에는 저렇게 자연스럽게 남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도현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의 휴대폰 안에 저장되고, 다음 계절에 다시 꺼내 보고, 싸웠다가도 문득 보게 되는 그런 장면들. 자기는 원래 거기 없는 쪽이라고 믿어왔는데, 하얀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그 믿음이 자꾸 허술해졌다.
“근데 나 사진빨 존나 안 받아. 실물은 멀쩡한데 찍히면 양아치 티만 더 나.”
툭 던진 말은 반쯤 농담이었고 반쯤 진심이었었다. 그는 습관처럼 얼굴의 점이 있는 쪽을 긁적이려다가, 오늘은 그러지 않았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손버릇마저 괜히 신경 쓰였고, 그 신경 씀 자체가 이미 자기답지 않았었다.
그녀보다 반 걸음 앞서 벚나무 쪽으로 걸어가던 이도현은 중간에 한번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이 강둑 위로 기울며 잔디를 연하게 번들거리게 했고, 분홍빛 꽃잎 몇 장이 느리게 떠내려와 그녀의 어깨 근처를 맴돌았다. 그 순간은 지나치게 영화 같았고, 그래서 오히려 약간 우스웠다. 연극영화학과를 나온 사람 옆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좀 민망했지만, 그는 속으로만 짧게 웃었다.
가까이 다가온 뒤에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한 손에 쥔 휴대폰을 자연스럽게 가져가려다 멈췄고, 대신 손바닥을 펴서 등을 가볍게 받쳐 주었다. 잔디에서 산책로 턱으로 올라서는 짧은 높이 차이였는데도 그는 괜히 그렇게 했다. 쓸데없는 데서 과하게 매너를 부리는 버릇이 자기한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 앞에서는 그 버릇이 더 자주 나왔다.
“조심해. 여기 턱 있다. 넘어지면 내가 업고 주차장까지 가야 되잖아.”
말은 투덜거렸지만 손은 끝까지 등을 받치고 있었고, 그녀가 안전하게 올라선 뒤에야 천천히 떨어졌었다. 벚나무 아래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다들 비슷한 자리를 탐내며 빙빙 돌고 있었다. 자리가 안 나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지. 속으로 불만을 궁시렁거리고 나서야 이도현은 주변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 햇빛이 너무 정면으로 들어오지 않고, 뒤쪽으로 강물까지 어렴풋이 잡히는 지점이 눈에 띄었다. 쓸데없이 익숙한 시선 처리였다.
“그래도 버리고 간다는 소리는 안 하잖아. 음... 사진은 누구한테 찍어달라고 부탁 해볼까...”
이도현은 순간 웃는 척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입꼬리는 어정쩡하게 올라갔고, 눈은 오히려 조용해졌다. 버리고 간다는 소리. 농담처럼 흘러갈 수도 있는 문장이었는데도, 그 말의 끝에는 이상하게 얇은 가시가 달려 있었고, 그는 그게 자기 쪽 살을 먼저 긁는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강 바람은 여전히 느긋했다. 벚꽃은 아무 일도 모르는 얼굴로 흔들렸다. 아이들 웃음소리도 둔치 위에서 둥둥 떴다. 그런데 그의 귀에는 잠깐 동안 그것들이 전부 멀어졌다. 버린다는 말은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자신을 설명해버리는 단어 같았다. 남한테 당한 적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자기가 먼저 아무렇지 않은 척 놓아버리는 쪽이 편했다. 그런데 지금 저 작은 미소를 올려다보는 눈 앞에서, 그는 이상하게도 도망가는 쪽이 아니라 남는 쪽 사람처럼 굴고 싶어졌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똑바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꼬리가 가늘게 휘는 모양이, 장난인지 확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게 사람 속을 뒤집었다. 그는 혀끝으로 입 안쪽을 한 번 눌렀다가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꾸깃 접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
“아, 그래. 그건 안 하지.”
짧게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 농담을 받는 톤으로 던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만큼은 쉽게 비틀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다음 말을 바로 잇지 못했다. 안 버리고 간다는 건 결국 곁에 있겠다는 말이었고, 곁에 있는 건 말보다 귀찮고 오래 걸리는 일이었고, 그는 귀찮은 것들을 늘 피해왔다. 그런데 신노해랑 엮인 뒤부터는 그 귀찮음이 이상하게 생활이 되었다. 늦은 밤 데리러 가는 일. 꿀물을 타는 일. 욕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화장을 지워주는 일. 장난감 반지를 진짜처럼 여기는 일. 전부 예전의 자기라면 비웃었을 종류였는데도, 지금은 그것들이 하나씩 자기 몸에 맞는 습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가 누구에게 사진을 부탁할까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도현은 주위를 한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벚나무 아래는 생각보다 더 붐볐다. 휴대폰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연인들, 꽃잎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포즈를 고치는 사람들, 지나가다 사진 부탁을 받고 웃으며 셔터를 눌러주는 대학생들. 햇빛은 사람들 어깨 위에 얇게 눌어붙어 있었고, 강 쪽에서는 물빛이 반사되어 눈이 조금 시렸다. 그는 한쪽 눈을 살짝 좁힌 채 가까운 쪽을 살폈었다. 부탁할 사람을 고르는 일조차 괜히 신중해졌다. 처음 보는 누군가의 휴대폰 속에 자기 얼굴이 들어가는 것도 낯설었지만, 그보다는 그녀 옆에 선 자기 모습이 남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하게 떨렸다. 그는 작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탈색이 오래된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거칠게 반짝였고, 손끝에는 미세하게 바람의 차가움이 걸렸다.
“아무한테나 맡기면 구도 개판으로 찍어. 셀카만 찍는 애들 많아서.”
괜히 심드렁한 척 말을 던졌지만, 사실은 조금 더 잘 나오고 싶었다. 그녀 옆에서만큼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인간처럼 찍히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싫게 간지러웠고, 그래서 그는 더 무심한 얼굴을 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중년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던 젊은 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흰 셔츠에 연청 바지를 입은,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고, 사진을 찍고 난 뒤에는 결과물을 보여주며 밝게 웃고 있었다. 이도현은 잠깐 망설였었다. 남한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종류의 부탁은 다른 문제였었다. 나이트 앞에서 “자기야, 한번만 들어와 봐” 하고 끌어들이는 건 쉬웠는데, 지금처럼 평범한 봄날 한복판에서 “우리 둘 사진 좀 찍어달라”고 말하는 건 웃기게도 더 어려웠다. 그 말은 너무 멀쩡했고, 너무 보통이었고, 그래서 더 어색했다. 그는 자기 속으로 짧게 욕을 삼켰다. 씨발, 별것도 아닌 걸 왜 이리 쫄지. 그러고는 신노해 쪽을 다시 봤다. 그녀는 휴대폰을 쥔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바람에 긴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붙었다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더 미루는 쪽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물어보고 올게.”
말은 퉁명스럽게 던졌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다정한 결심이 붙어 있었다. 그는 벚꽃 잎 하나가 그녀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도현은 말을 잇기 전에 먼저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길게 남았다. 크림색 볼레로 위에 붙은 연분홍 조각은 너무 가벼워서, 털어내면 그대로 바람에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그는 그 꽃잎을 집어 들고 잠깐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두니 종잇장보다 얇은 결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비쳤다. 별것 아닌데도 숨이 잠깐 막혔다. 이 봄이, 이 오후가, 자기 같은 인간 손에 들어오면 괜히 금방 부서질 것 같았다.
“가만히 좀 있어. 머리에도 붙었나 보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 쪽으로 반 걸음 더 다가섰다. 핑계는 충분했다. 떨어진 꽃잎 몇 장.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 그러나 핑계가 있다고 해서 심장이 조용해지는 건 아니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볼 옆으로 쓸려와 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라벤더 향이 아주 약하게 스쳤다. 이도현은 그 향을 너무 잘 알았다. 욕실 수건에서 나던 냄새. 베개 끝에 남아 있던 냄새. 새벽에 잠결로 끌어안았을 때 목덜미 가까이에서 올라오던 냄새. 그는 괜히 목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면서도 표정은 최대한 시큰둥하게 굴었다. 들키면 지는 것처럼, 늘 그래왔으니까. 그래도 손길만은 거칠어지지 않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한 가닥도 당기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벚나무 아래는 붐볐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휴대폰을 치켜들고, 서로의 어깨를 붙이고 섰다. 그 평범한 북적거림이 오늘은 유난히 눈에 잘 들어왔다. 봄볕은 사람들 머리 위에 납작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강 쪽에서 튄 빛은 나뭇잎 그림자 사이로 부서졌다. 이도현은 그녀와 나란히 선 채 잠시 주변을 훑었다. 조금 전 봐두었던 그 젊은 여자가 아직 근처에 있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손이 가볍고 빨랐다. 찍어준 사진을 확인하는 부부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이트 앞에서 처음 보는 사람 붙잡는 것보다 백 배는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몸 안쪽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부탁의 내용이 너무 멀쩡해서 그랬다. 너무 보통이라서. 마치 자기가 정말 평범한 남자친구인 것 같아서. 아니, 오늘만큼은 진짜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더 쪽팔렸다.
“잠깐만 있어. 내가 금방 말 걸고 올게.”
그는 낮게 말하고 그녀의 어깨를 한번 가볍게 눌렀다. 그 눌림은 진정시키는 손길처럼도, 잠시 여기 있어 달라는 부탁처럼도 느껴졌다. 이도현은 곧장 그 여자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느리지 않았다. 다만 괜히 등을 곧게 세우고, 표정을 너무 거칠지 않게 정리하려는 쓸데없는 신경질이 몸에 붙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는 막 사진을 마치고 휴대폰을 돌려주던 참이었다. 이도현은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혀끝에 붙어 있던 밤거리식 말투를 삼키고, 최대한 멀쩡한 목소리를 골랐다.
“저기, 죄송한데요.”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도현은 손으로 신노해 쪽을 한번 가리켰다. 벚꽃 아래 조용히 서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설명은 더 짧아졌다.
“저희 둘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어요?”
여자는 금방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당연하죠.” 대답은 가벼웠다. 그런데 이도현의 속은 그 가벼움만큼 가볍지 않았다. 그는 괜히 “감사합니다”를 한 번 더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몇 걸음이 이상하게도 길었다. 발밑의 흙길은 마른 잎을 밟을 때마다 바삭거렸고, 어디선가 튀김 냄새와 잔디 냄새가 섞여 날아왔다. 이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이쯤 되면 그냥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증거 같았다. 오늘의 햇빛과, 벚꽃과, 그녀 옆에 선 자기 얼굴이 어딘가에 저장되는 것. 그건 밤마다 흐려지던 많은 순간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좋으면서도 무서웠다. 좋아서 무서운 건 언제나 오래 남았다.
그는 그녀 앞에 멈춰 섰다. 휴대폰을 받아든 여자가 몇 걸음 떨어져 자리를 잡는 동안, 이도현은 손을 어디 둬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바지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무심해 보였다. 그냥 내려두자니 너무 어색했다.
“도현아, 손은 이리로.”
그의 손이 허공을 맴돌자 끌어와 자신의 허리를 두르게 했다. 그리고 그의 양 뺨을 감싸쥐고 끌어와, 자신과 뺨을 맞대게 했다. 제법 다정해 보이는 연인이 모습을 카메라의 렌즈가 붙잡고 있을 터였다. 키 차이가 꽤 많이 나는 탓에 허리가 숙여진 그는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본래 행복이라는 건 조금,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카메라 봐야지~”
이도현은 허공에서 갈 곳을 못 찾고 맴돌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붙들리는 순간, 숨을 아주 짧게 삼켰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원피스 천은 햇볕을 먹고 미지근했고, 그 아래의 체온은 더 또렷했다. 얇은 천 한 겹을 사이에 두고도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가 이렇게 선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몸을 함부로 써왔던 자기에게는 이상하게도 새삼스러웠다. 그는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비웃거나, 대충 한마디 지껄여 분위기를 흘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양 뺨을 감싸 쥔 손이 먼저였다. 작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제 얼굴을 붙잡아 끌어오고, 뺨이 뺨에 닿는 그 단순한 접촉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는 오히려 더 굳었다. 라벤더 향이 아주 가까운 데서 올라왔다. 숨결이 옆으로 스치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턱 가까이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는 카메라보다 먼저 제 귀 끝이 뜨거워지는 걸 알아챘다. 본명으로 불린 직후에는 늘 그랬다. 이름이란 게 참 좆같았다. 남들한텐 그냥 부르면 되는 소리인데, 자기한텐 꼭 살갗 밑을 뒤집어 까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소름 돋게 왜 이래.”
말은 그렇게 나갔다. 익숙한 툴툴거림이었다. 그래야 덜 들키는 척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목소리 끝은 생각보다 무르렀다. 억지로 거칠게 다듬으려 했는데도, 뺨 옆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열 때문에 결이 풀어졌다. 그는 시선을 카메라 쪽으로 돌리라는 뜻을 뒤늦게 이해했고, 그제야 휴대폰을 든 젊은 여자 쪽으로 눈을 옮겼다. 여자애는 벚나무 아래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조금만 더 붙어 보세요.”
밝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그 말이 괜히 우스워서, 이도현은 코로 짧게 숨을 흘렸다. 더 붙으라고. 이미 뺨이 닿아 있었고, 허리에는 제 손이 둘러져 있었고, 이 정도면 남이 보기엔 충분히 다정한 그림일 텐데도, 그는 그 한마디에 정말 조금 더 바싹 당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손끝에 힘이 아주 미세하게 들어갔다. 의식한 순간이었다. 원피스 주름 하나가 손안에서 살짝 구겨졌다. 그 조심스러운 구김조차 남길 만한 기억 같아서, 그는 괜히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바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람들 웃음소리는 둔치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런데 이도현에게는 그녀의 뺨이 닿은 부분만 유난히 뜨겁고 또렷했다.
그는 한쪽 어깨를 아주 조금 낮췄다. 키를 맞추려는, 너무 티 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그의 목 옆을 다시 스쳤다. 간질거렸다. 별것 아닌 자극이었는데 등줄기를 따라 이상한 전류처럼 흘렀다. 사진 한 장 찍는 일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게 병신 같았다. 나이트에서 낯선 여자들이 팔을 끼고 기대도 미동 없던 인간이, 지금은 뺨 한 번 닿은 걸로 속이 뒤집혔다. 기준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원래 망가질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상대가 이제야 정확히 들어온 건지도 몰랐다. 그는 자기 생각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게 싫어서, 일부러 입을 다시 열었다.
“야, 빨리 찍어달라고 그래. 나 이런 거 오래 못 해. 존나 쪽팔려.”
그런데도 몸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두른 손이 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옆선을 따라 아주 느리게, 마치 진정시키는 듯이 한 번 눌렀다 떨어졌다. 그 작은 압박에는 의도하지 않은 진심이 묻었다. 여기 있다. 안 도망간다. 이상하게도 그런 뜻이 손끝에서 먼저 나갔다. 스스로도 그걸 느꼈고, 느낀 뒤에는 가슴 안쪽이 조용히 무거워졌다. 누군가 곁에 남는다는 건 늘 말보다 행동이 먼저 들켰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나, 둘, 셋!” 젊은 여자가 명랑하게 숫자를 세었다. 셔터음이 찰칵, 가볍게 울렸다.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 잠깐만요. 너무 예뻐서 한 장 더 찍을게요.”
여자는 스르르 웃으며 각도를 조금 바꿨다. 이도현은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느슨해졌다. 진짜 웃음이 섞였다. 일부러 만든 표정이 아니었다. 뺨에 닿은 살의 온도와, 허리에 감긴 자기 손과, 봄볕 아래에서 당연한 얼굴로 자기 곁에 서 있는 사람 하나가 그걸 만들었다. 그는 문득 펭귄 인형이 놓인 신노해 집 거실 소파를 떠올렸다. 자신이 선물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놓여있는 풍경이 익숙하다는 게 낯설었다.
“우리 잘 어울리긴 하나봐.”
잘 어울리긴 하나 보냐고? 그 말은 방금 저쪽에서 먼저 들은 소리 같았는데. 이도현은 웃음소리를 삼켰다. 대신 입꼬리가 저절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카메라 렌즈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도, 시선은 자꾸 옆으로 흘렀다.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은 햇빛을 받아 더 하얗게 빛났다. 그 미소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냥 사진용으로 만든 표정인지, 그는 구별할 수 없었고 구별하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금 제 어깨 옆에 기대어 있는 이 온기와, 허리에 감긴 제 손과,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목소리 같은 것들. 그런 전부가 진짜였다. 그는 셔터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는 걸 들었고, 그제야 고개를 아주 조금만 움직여 그녀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존나 잘 어울리지. 지나가는 개도 알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슬쩍 웃었다. 진심이 섞인 농담은 언제나 가장 위험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었고, 너무 얕게 던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그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심정이었다. 젊은 여자는 “네, 다 됐습니다!”하고 밝게 외쳤고, 이내 휴대폰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진은 몇 장 찍히지 않았는데도 꼭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그는 여자에게서 휴대폰을 건네받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여자가 다시 제 일행에게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화면을 바로 확인하지 않았다. 왠지 그러기가 꺼려졌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찍혔을지보다, 그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의 모습 전체가 어떨지 보는 게 더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듯 말했다.
“고생했네. 모델 하느라. 이제 밥이나 마저 먹으러 가자.”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그의 시선은 손안에 든 휴대폰 액정에 머물렀다. 잠금 화면 위로 비친 제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눈 밑은 여전히 퀭했고, 탈색한 머리는 푸석했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신노해의 웃는 얼굴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한번 축였다. 이걸 누르면, 사진첩을 열면, 그 안에는 방금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을 터였다. 그는 화면을 톡, 눌러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사진첩 앱을 찾아 들어갔다. 가장 최근 항목에 뜬 사진은 여러 장이었고, 그중 한 장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신노해의 옆모습이, 다른 한 장은 그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정면 모습이 찍혀 있었다. 마지막 사진. 그게 문제였다.
두 사람이 뺨을 맞대고, 이도현의 손이 신노해의 허리를 감싸고, 둘 다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는 그 사진. 너무 평범하고, 너무 전형적인 연인들의 모습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이도현은 저 사진 속의 남자가 자기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었다. 저렇게 풀어지고, 저렇게 무방비하게 웃는 남자가 자기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기가 맞았다. 모든 디테일이, 심지어 손목에 희미하게 보이는 흉터 자국까지 전부 자기의 것이었다. 그는 짧게 숨을 멈췄다. 이건 증거였다. 부인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자기가 이 봄날에, 이 여자 옆에서, 이렇게 행복해 보였다는 명백한 증거. 그는 조용히 화면을 껐다. 그리고 휴대폰을 도로 신노해에게 건네주었다.
“봐봐. 니가 더 잘 나왔네. 넌 역시 사진빨도 잘 받아.”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게 던졌지만 속은 복잡했다. 돗자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남겨진다는 건 늘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사진 한 장에도 그 무게는 실려 있었다. 돌아온 돗자리 위는 아까와 그대로였다. 치킨은 식었고, 캔음료는 미지근해졌다. 그런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펼쳐져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아까 본 사진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런 평범한 하루가 자기가 진짜로 원하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옆에 앉는 신노해를 바라보았다.
아까 찍은 사진 한 장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탓인지,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심장이 괜히 덜컥거렸다.
그는 고개를 슬쩍 기울여 그녀를 보았다.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은 불안정하면서도 이상하게 그림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그냥 편하게 앉아서 먹어. 체하겠다, 그렇게 불편하게 있으면.”
목소리는 평소처럼 퉁명스러웠지만,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가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 몫의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똑같이 치킨 한 조각을 집어 그녀 입가로 가져갔다.
“너도 먹어야지. 나 혼자 돼지 될 수는 없잖아.”
장난처럼 말을 던졌지만, 그 안에는 이전의 기억이 슬쩍 묻어 있었다. 돼지라는 말에 상처받던 얼굴. 그는 다시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볍게 웃으며 젓가락 끝을 입술 가까이에서 흔들었다. 그녀가 입을 벌리자, 그는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넣어주었다.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을 보면서, 그는 문득 이 평화로운 오후가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자기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햇빛은 점점 더 기울어 강물 위로 금가루처럼 쏟아졌고, 바람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실어 멀리까지 날랐다.
남은 치킨 조각도 몇 개 없었다. 이도현은 돗자리 위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한쪽으로 모았다. 비닐봉지를 벌려 캔과 종이 상자를 차곡차곡 담았다. 그런 일을 하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예전 같았으면 대충 쑤셔 넣거나, 아니면 그냥 버려두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뒷정리까지 깨끗하게 하고 싶었다. 이 완벽한 하루의 끝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티슈를 한 장 꺼내 테이블로 쓰던 상자를 꼼꼼하게 닦았다. 그리고 남은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손 닦아. 기름 묻었을 거 아니야.”
그는 무심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제 손으로 직접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장난감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닦을 때는 괜히 더 힘이 들어갔다. 플라스틱 표면에 묻은 기름때를 문지르며, 그는 이 반지가 진짜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짜 멍청이 다 됐네. 그는 속으로 욕을 삼켰지만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 닦아주고 나서도 놓지 않았다. 대신 깍지를 껴 잡았다. 손바닥이 맞닿는 감촉이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웠다. 그는 그 손을 잡은 채, 돗자리 위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하늘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이제는 파란색보다 주황빛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을, 이 온기를, 이 냄새를 전부 기억하고 싶었다.
“꺄!”
그가 드러눕자, 자신도 휘청하고 옆에 풀썩 눕혀졌다. 고작 손깍지 하나 끼워 잡고 있었을 뿐인데 휩쓸리고 말았다. 옆으로 누운 탓에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스치며 사락거리는 것이 형체 없는 무언가가 쓰다듬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도현은 짧게 터져 나온 비명에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깍지 낀 손을 놓기 싫어서, 눕는 김에 같이 끌어당겼을 뿐이었다. 풀썩, 하고 제 옆으로 쓰러지는 가벼운 몸의 무게가 돗자리를 통해 전해졌다.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은 채,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야 가득 들어온 얼굴은 놀란 기색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동그래져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그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강의 봄바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조금 전 제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던 그 바람이 이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좋게 들렸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어차피 여기 누워 있을 거였잖아.”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장난감 반지의 차가운 플라스틱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그 감촉을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오후였다. 사람들의 말소리, 멀리서 들리는 자전거 벨 소리, 강물이 햇빛에 부딪혀 반짝이는 소리까지. 그 모든 소음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작은 섬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 마주 본 눈동자는 깊고 까맸다. 그 안에 제 얼굴이 비치는 걸 보는 순간, 그는 또다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말은 까불거렸지만,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밤거리의 양아치일까, 아니면 이제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보일까. 그는 잡고 있던 손을 풀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눈 밑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햇볕에 살짝 달아오른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잠시 그 감촉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이 시간이 이상하게도 소중했다. 마치 도둑질한 물건처럼,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불안감과 함께 찾아온 달콤한 행복이었다.
이도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기울어진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긴 속눈썹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뺨 위에 옅게 드리워졌다. 그는 홀린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햇빛 맛 나는 키스는 처음이네.”
그는 다시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웠고, 그녀의 손을 찾아 다시 깍지를 꼈다.
“... ...반칙 아닌가?”
“반칙은 니가 먼저 했지. 사람 이름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거.”
이도현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옆으로 누워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간질거렸다. 그는 깍지 낀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얼굴이 달아오른 건 피차일반이었지만, 먼저 놀리는 쪽이 늘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는 일부러 더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늘은 이제 막 노을이 번지기 시작해, 파란색과 주황색이 어색하게 뒤섞인 이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꼭 지금 자기 마음 같았다. 설레면서도 불안하고, 좋으면서도 어딘가 아팠다. 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공기는 풀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남은 치킨 냄새가 섞여 있었다. 평범한 주말 오후의 냄새였다. 자기 인생과는 아무 상관없을 거라고 믿었던 종류의 냄새.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들어 그녀의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었다.
“꼴에 부끄러워하기는. 이런 거 한두 번 해보나.”
또다시 툭, 하고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나오는 방어기제 같은 거였다. 그는 스스로도 제 말버릇이 좆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은 타투처럼 깊게 새겨져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예쁘게 좀 말하지.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욕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말을 꺼냈다. 깍지 낀 손을 풀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대낮부터 한강에서 키스 갈긴 내가 죽일 놈이지. 됐냐?”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옆에 바싹 붙어 누웠다. 어깨와 어깨가 닿았다. 얇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머리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라벤더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안정감이 들었다. 지긋지긋한 불면증도,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도 이 향기 앞에서는 힘을 잃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아이를 재우는 아비처럼, 아주 조심스럽고 규칙적인 손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안고 있다가,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집’일지도 모른다고. 차가운 벽과 텅 빈 냉장고가 있는 곳이 아니라, 온기가 있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런 곳.
“...이제 슬슬 들어갈까. 해 지면 쌀쌀해질 텐데.”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은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하늘에 별이 박히고, 주변의 소음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하지만 그녀가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는 품에 안은 몸이 생각보다 가늘다고 생각했다. 더 잘 먹여야겠네. 살도 좀 찌우고. 그는 속으로 다짐하며 그녀의 귓바퀴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지 그녀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는 낮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 온기를,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하늘은 점점 더 짙은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강 건너편 빌딩 숲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현실로.
이도현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돗자리를 접고 쓰레기봉투를 챙기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하지만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만한 고요함에 가까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벚나무는 이제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남아 있었다. 아까 사진을 찍었던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연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도는 거였다. 누군가 떠난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채우고, 행복의 총량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오르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 봄에도, 우리 여기 또 오자. 그는 그녀를 위해 자동차의 조수석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응, 그러자.”
그가 다음을 약속하는 일은 드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바라보다, 베시시 웃으며 화답했다. 의미없는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것은 그만큼의 외로움과 고독이 쌓이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만난 이후로는 다음날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잠시 제 얼굴에 머물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맑고 깊은 눈동자.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꼭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그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을 약속하는 일이 드물었던가.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일은커녕 한 시간 뒤의 일도 장담하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계획이라는 건 늘 빚쟁이나 조폭들에게 쫓길 때나 세우는 거였지, 이렇게 평범한 날들을 위해 세워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다음 봄’이라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말처럼.
“뭘 그렇게 쳐다봐. 내가 한 말은 무조건 지키는 거 몰라?”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베시시 웃으며 화답하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 미소 하나에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 박동이 귓가에 쿵쿵 울렸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운전석에 올라탔고, 뒤이어 그녀가 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덜컹, 하고 낡은 자동차 엔진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를 냈다. 그는 핸들을 잡은 채 잠시 창밖을 보았다. 완전히 어둠이 내린 한강 공원은 낮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흔들리는 나뭇잎들, 강 건너편 빌딩들이 쏘아 올린 현란한 불빛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자기만 쏙 빼놓은 것 같은 이질감. 늘 느끼던 감정이었는데도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옆자리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낯선 풍경이 조금은 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올림픽대로에 합류했다. 라디오에서는 때 지난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대와 나, 설레는 이 마음은…’ 쿵짝거리는 촌스러운 리듬과 달콤한 가사. 평소 같았으면 욕을 지껄이며 채널을 돌렸을 텐데, 오늘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흥얼흥얼,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조금씩 밀렸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게 좋았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이 길의 끝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자기답지 않은 소원을 빌었다. 강변북로의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차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에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졌다. 그 모습을 훔쳐보며, 그는 문득 깨달았다. 다음 날이 기대된다는 것. 그건 자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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