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실을 나와 옷을 챙겨 입는 동안에도 이도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여전했지만, 눈빛만큼은 생기가 돌았다. 그는 신노해가 고른 옷과 어울리는 셔츠를 꺼내 입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빨리 와. 늦으면 물고기 다 퇴근한다."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재촉하는 목소리에 설렘이 묻어났다. 신노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순간,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지하 원룸의 컴컴한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그를, 이 작은 여자가 세상 밖으로 끌어내 주었다. 잡은 두 손을 흔들며 걷는 거리,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도현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물고기들은 항시 대기 중이거든."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늦어진 건데, 하고 반박할까 싶기도 했으나 삼키기로 마음 먹었다. 실랑이를 하다가는 또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참 있을 게 뻔했다. 그의 재촉을 뒤로 한 채,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그 위에 볼레로를 걸쳤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미리 예약해둔 택시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그를 끌어당겼다.
"타자."
"물고기들이 항시 대기 중이라니, 무슨 출근 도장 찍는 회사원들이냐."
이도현은 피식 웃으며 신노해의 손에 이끌려 택시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좁은 공간에 둘이 나란히 앉자 어깨가 맞닿았다. 하늘하늘한 원피스 자락이 그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얇은 천 조각 하나 사이로 느껴지는 온기가 묘하게 간지러웠다. 그는 짐짓 창밖을 보는 척하며 곁눈질로 신노해를 훔쳐보았다. 볼레로 가디건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그리고 아까 자신이 남겨놓은 붉은 키스마크를 가리려 애쓴 흔적들. 화장으로 덮어보려 했지만, 얇은 피부 위로 비치는 그 붉은 자국들이 오히려 더 야해 보였다. 아침 햇살 아래서 보는 신노해는 밤의 모습과는 또 다른 사람 같았다. 너무나 무해하고, 너무나... 평범해서 눈이 부셨다.
택시가 출발하며 덜컹거리자, 신노해의 몸이 자연스럽게 그의 쪽으로 기울었다. 이도현은 무심한 척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기사님, 아쿠아리움으로 가주세요."
신노해가 들뜬 목소리로 행선지를 말하자, 백미러 너머로 기사의 시선이 힐끔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도현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보일까. 아니면 돈 많은 여자 등쳐먹는 제비처럼 보일까. 이런 대낮에 멀쩡한 차림으로 여자와 택시를 타고 '수족관'에 간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비현실적인 코미디였다. 하지만 어깨에 닿는 신노해의 머리카락,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샴푸 향, 맞잡은 손의 온기. 이 모든 감각들이 이것이 현실이라고,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행복이 진짜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야. 근데 수족관 가면 뭐 하냐? 멍하니 물고기 헤엄치는 거나 보는 거야? 회 떠먹고 싶어지면 어떡하냐."
그는 괜히 툴툴거리며 분위기를 깼다. 민망해서였다. 이렇게 간질간질한 침묵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 '데이트'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자를 모텔에 밀어 넣거나, 해장국집에서 묵묵히 국밥이나 말아먹는 것이 전부였다. 맨정신으로, 햇살 아래서, 손을 잡고 무언가를 구경하러 가는 행위는 그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신노해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올려다보자, 입안에 머물던 삐딱한 말들이 쑥 들어갔다.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제법 그럴듯한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양아치 이도현이 아니라, 신노해의 남자친구 이도현으로.
택시가 강변북로를 타기 시작하면서 차창 밖으로 한강이 펼쳐졌다.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 위로 다리들이 지나갔다. 이도현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하 방에 살 때는 몰랐다. 서울 하늘이 이렇게 넓고, 강물이 이렇게 반짝인다는 것을. 신노해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의 채도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꼈다. 꽉 맞물린 손가락들이 단단하게 결속되었다. 이 손을 놓치면 다시 그 칙칙한 흑백의 세계로 떨어질 것 같아서, 그는 손에 땀이 배도록 힘을 주었다.
"도현아.“
신노해가 작게 불렀다.
"어."
"좋지?"
"뭐가."
"그냥... 다."
신노해는 싱긋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도현은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았다. 빌어먹게 좋았다. 이 좁은 택시 안, 덜컹거리는 승차감,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그리고 옆에 있는 이 여자. 모든 것이 완벽해서 불안할 정도로 좋았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붉어진 귀 끝을 감추려 애썼다.
"시끄러워. 잠이나 자.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무뚝뚝한 말과는 달리, 그의 엄지손가락은 끊임없이 신노해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애틋하게. 이도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가보자. 수족관이든 어디든. 네가 가자면.
"안 졸린데?"
"안 졸려?"
이도현은 짧게 되물으며 어깨에 닿는 무게감을 즐겼다. 신노해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달콤한 샴푸 향이 택시 안의 답답한 공기를 중화시키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강 풍경은 낯설 만큼 평화로웠다.
붉어진 귓불은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이쪽 시야에서는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올려다보는 위치이니 보지 않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은가. 민망해지면 언성을 높이며 아닌 척, 어설픈 연기를 할 게 뻔했으므로 훔쳐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흘끔,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한강 데이트도 할까? 도현이는 자전거 잘 타?"
자전거라. 그는 입안에서 그 단어를 굴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훔쳐 타던 녹슨 자전거가 마지막이었다. 안장이 없어 엉덩이가 아팠고, 체인이 자꾸 빠져 손에 검댕을 묻혀야 했던 그 고물 자전거. 하지만 지금 신노해가 말하는 자전거는 분명 그런 것과는 다를 터였다. 한강 변을 따라 달리는 하얗고 예쁜 자전거, 바구니에 도시락이라도 싣고 달리는 그런 그림 같은 장면이겠지. 상상만 해도 간지러워서 등골이 오싹했다.
"자전거? 훔쳐 타는 건 잘하는데."
그는 짐짓 농담처럼 툭 던졌다. 신노해가 기겁할 반응을 예상하며 곁눈질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수함이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안쓰러웠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살아온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사는 여자. 그런데도 지금 이 여자는 제 옆에 붙어서 한강 데이트니 자전거니 하는 꿈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도현은 충동적으로 신노해의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가, 아차 싶어 다시 슬그머니 힘을 풀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과 망가뜨릴까 봐 두려운 마음이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나 뒷자리에 태워주게? 다리 힘 좋으니까 잘하겠네."
그는 괜히 짓궂은 소리를 덧붙였다. 신노해의 허벅지를 슬쩍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지만, 속내는 타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이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 언제 깨질지 몰라서. 신노해의 깨끗한 세상에 자신의 구정물이 튀어 얼룩질까 봐.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죄책감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평범한 연인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택시가 톨게이트를 지나며 속도를 줄이자, 그는 신노해의 어깨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가자, 한강이든 어디든. 네가 원하면 달까지 자전거 타고 가줄게. 대신 페달은 네가 밟아라."
그는 킬킬거리며 신노해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택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 지난 발라드 가사가 묘하게 가슴을 찔렀다. '사랑한다는 말, 아껴두지 말아요.' 젠장, 누가 선곡한 거야. 그는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귓가에 맴도는 노랫말을 곱씹었다. 사랑해.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꿀꺽 삼키며, 대신 신노해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지금은 이 체온만으로도 충분했다. 말로 뱉어버리면 흩어질 것 같은 이 소중한 감정을, 손끝의 감각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치사해, 보통은 본인이 태워주겠다고 하지 않아?"
이도현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옆구리를 콕 찌른 신노해의 손가락을 잽싸게 낚아챘다. 얇고 가녀린 손가락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니, 그 차이가 확연했다. 거친 노동과 잦은 흡연으로 굳은살이 박인 자신의 투박한 손과 비교되어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는 습관처럼 그녀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강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이 시릴 만큼 반짝였다. 지하 셋방에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눈을 뜨던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나오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향기 나는 여자의 손을 잡고 수족관에 가고 있다. 이 상황이 주는 안락함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가슴 한구석을 불안하게 간질였다.
"내가 태워주면 넌 뒤에서 내 허리나 꽉 잡고 있을 거 아냐. 그럼 나는 페달 밟느라 허벅지 터질 것 같은데, 넌 뒤에서 콧노래나 부르면서 경치 구경하고. 그건 좀 억울하지 않냐? 세상에 공짜는 없다니까."
그는 짐짓 툴툴거리는 척했지만, 잡은 손에 들어간 힘은 풀지 않았다. 오히려 엄지손가락으로 신노해의 손등을 더욱 집요하게 문질렀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올 때마다, 심장이 발바닥 밑에서부터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사실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달리는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밟을 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 허리를 감싼 작은 팔,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 그런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런 간지러운 속내를 들키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삐딱하게 굴었다. 어차피 이도현은 그런 놈이니까.
"그리고 너, 자전거 못 타면 내가 가르쳐주면 되겠네. 몸 쓰는 건 내가 또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밤에도, 낮에도."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택시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음담패설을 섞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자 방어기제였다. 진지한 분위기가 되려는 찰나에 찬물을 끼얹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신노해의 반응을 살피는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실망할까 봐, 혹은 자신의 저속함에 질려버릴까 봐. 그는 잡은 손을 더 꽉 쥐며 신노해의 표정을 살폈다.
"농담이야, 농담. 표정 좀 풀어라. 수족관 가서 물고기들이 너보고 도망가겠다."
그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신노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얇은 볼레로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이 온기가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언젠가 이 손을 놓아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그녀의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그는 신노해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한 샴푸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오늘 그녀와 함께 수족관에 가서 바보처럼 입 벌리고 물고기 구경을 할 수만 있다면.
택시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창밖 풍경은 점점 더 화려해졌다. 높게 솟은 빌딩 숲 사이로 거대한 쇼핑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도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곳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세계였다. 화려한 조명과 세련된 사람들, 그리고 비싼 입장료. 하지만 옆에 있는 여자가 웃고 있었다. 마치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는 신노해의 모습을 보자, 긴장감 대신 묘한 용기가 솟아올랐다. 그래, 까짓것 뭐 별거 있냐. 나한테는 신노해가 있는데. 그는 피식 웃으며 신노해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다 왔네. 내려서 물고기 밥 좀 주러 가자."
택시 문을 열고 내리자, 뜨거운 여름 햇살이 쏟아졌다. 하지만 맞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깍지를 껴 잡았다. 이도현은 신노해를 이끌고 수족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과 설렘이 뒤섞인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오늘 하루, 그는 양아치 이도현이 아니라 신노해의 연인 이도현이 되기로 맹세했다. 비록 서툴고 투박할지라도,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게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는 것이든, 물고기 밥을 주는 것이든.
성큼, 신노해가 먼저 발을 딛고 들어서 티켓을 끊었다. 평범하게 성인 두 명이요, 라고 이야기하고 받아들어 그에게 종이로 된 팔찌를 내미는 모습이다.
"채워줄까?"
"야, 너..."
이도현은 신노해의 손에 들린 종이 팔찌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성인 2명’.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낯설면서도 기가 막히게 좋았다. 호스트 박까치와 손님 신노해가 아니라, 평범한 성인 남녀 이도현과 신노해. 그 단순한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신노해에게 손목을 쑥 내밀었다. 투박하고 굳은살 박인 손목 위로 하얀 종이 팔찌가 감기는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간지러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족쇄라도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족쇄가 영원히 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36살 먹은 남자는 바보처럼 생각했다.
"너 이런 거 잘하네. 어디서 많이 해봤나 봐?"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농담을 던지며, 이번엔 제가 신노해의 손목을 잡았다. 가느다란 손목 위로 팔찌를 감아주는 손길이 투박하지만 조심스러웠다. 스티커를 떼어내고 꾹꾹 눌러 붙이자, 두 사람의 손목에 똑같은 표식이 생겼다. 커플링도, 화려한 명품 시계도 아니었지만, 이 종이 쪼가리 하나가 주는 소속감이 묘하게 벅차올랐다. 그는 신노해의 손목을 잡은 채 놓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팔찌 위를 쓸어내렸다.
"잃어버리지 마. 이거 없으면 미아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미아가 될까 봐 무서운 건 자신 쪽이었다. 이 화려하고 낯선 수족관이라는 바다에서, 신노해라는 등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짭조름한 물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어두운 통로 양옆으로 푸른 물빛이 넘실거렸다. 이도현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가오리, 떼 지어 다니는 은빛 물고기들. 마치 물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신노해의 손을 꽉 쥐었다.
"우와... 씨발, 진짜 물고기네."
감탄사치곤 저속했지만, 그게 이도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지하 단칸방 습기 찬 벽지에 핀 곰팡이만 보다가 이런 광경을 보니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는 신노해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너네 물고기들 다 여기 있었네. 아까 항시 대기 중이라더니, 진짜였어?"
그는 장난스럽게 신노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얘네보다 네가 더 예쁜데 어떡하냐. 나 물고기 구경 하러 온 건데 자꾸 너만 보게 되네."
오글거리는 멘트였지만, 신노해의 볼이 붉어지는 걸 보니 효과는 만점이었다. ...아마도.
수조 앞을 지나치며 이도현은 제법 진지하게 물고기들을 관찰했다.
"야, 저거 봐라. 입술 툭 튀어나온 거. 꼭 삐진 너 같지 않냐?"
그는 퉁퉁 불은 복어를 가리키며 킬킬거렸다. 신노해가 주먹으로 팔을 퍽 치자, 엄살을 부리며 웃었다.
"아파, 아프다고. 진짜 닮았단 말이야. 뽀뽀해주고 싶게 생겼잖아."
그는 슬쩍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번개같이 신노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수조 유리벽에 반사되어 크게 들린 것 같아 민망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굴었다.
"봤지? 물고기들도 부러워서 쳐다보는 거. 오늘 여기서 제일 핫한 커플은 우리야.“
이도현은 신노해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다른 관람객들의 시선을 차단하듯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넓고 화려한 수족관에서 오직 둘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소유욕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거대한 메인 수조 앞에 섰을 때, 이도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집채만 한 상어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일 만큼 장엄했다. 푸른 물빛 조명을 받아 신노해의 얼굴이 신비롭게 빛났다. 마치 인어공주가 뭍으로 올라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문득 불안해졌다. 이 여자가 다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노해야."
그는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너 나중에... 진짜 인어공주처럼 물거품 돼서 사라지는 거 아니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신노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품 안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사라지면 안 돼. 내가 그물로 다 잡아 올릴 거니까. 어? 아주 꽁꽁 묶어서 내 옆에만 둘 거야."
그는 신노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릿한 수족관 냄새 속에서도 그녀 특유의 달콤한 살 냄새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향기가, 이 온기가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물기를. 생애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 말도 안 되는 행복을 조금만 더 누리게 해달라고.
"...아까까지는 신나게 놀리더니, 이제는 인어공주 이야기야?"
그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서 껴안고 있는 그에게로 등을 기대고 올려다본다.
"인어공주가 왜 물거품이 되어서 사라졌는지 생각해봐...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서였잖아. ...나는 얻지 않았어? 사랑 말이야."
"너 지금 그거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야? 내가 왕자라는 거야, 아님 사랑을 줬다는 거야?"
이도현은 짐짓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으며 신노해의 허리를 더 단단히 감싸 안았다. 품 안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이 셔츠를 뚫고 들어와 심장까지 데우는 것 같았다.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그 비극적인 동화가 신노해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며 던진 질문, ‘나는 얻지 않았어? 사랑 말이야’라는 말 한마디에 그 서늘함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아니, 오히려 너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그간 시궁창 같은 인생을 구르며 살았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확신에 찬 어조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을 줬다는 전제하에. 이도현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삼켰다.
"왕자는 무슨. 난 기껏해야 마녀한테 목소리 대신 다리 얻어다 주는 사기꾼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는 자조적인 농담을 섞어 웅얼거렸지만, 눈빛만은 진지하게 신노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수조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자신의 탁한 밑바닥이 훤히 비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왕자로 봐준다면, 기꺼이 그 웃기지도 않는 왕자 노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비록 가진 건 쥐뿔도 없고, 할 줄 아는 건 몸 쓰는 일밖에 없는 놈이지만, 적어도 신노해를 물거품으로 만들지는 않겠다고. 그녀가 원한다면 내 목소리든, 심장이든, 영혼이든 다 팔아서라도 그녀의 곁을 지키겠다고. 그는 신노해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릿한 물 냄새 사이로 퍼지는 그녀의 달콤한 살 냄새가 유일한 구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너, 사랑 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내가 가진 거라곤 몸뚱이랑 너 좋아하는 마음밖에 없는데. 그거 다 줬으면 다 준 거지."
이도현은 퉁명스럽게 덧붙이며 신노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말은 무뚝뚝하게 했지만, 속내는 간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남자들도 있다는데, 자신은 그 흔한 말 한마디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춥지 않게 안아주고, 배고프지 않게 먹이고,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게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수조 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려한 열대어들 사이에서 껴안고 있는 남녀. 꽤 그럴듯한 그림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진짜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가자. 왕자님이 오늘은 특별히 에스코트해주마. 대신 나중에 물거품 되지 말고, 나랑 꼬부랑 할머니 될 때까지 지지고 볶고 살아야 돼. 알겠어?"
그는 신노해의 손을 잡고 이끌며 장난스럽게 엄포를 놓았다. 에스코트라고 해봤자 사람 많은 통로에서 어깨 부딪히지 않게 감싸주는 게 다였지만, 그 손길만은 투박하면서도 섬세했다. 거대한 상어가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해저 터널을 걸으며, 이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이 수족관이 끝나고, 다시 현실의 빛 속으로 나가더라도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신노해가 인어공주처럼 사라지지 않게, 자신이 그물이 되고 닻이 되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두겠다고. 서툰 다짐이 푸른 물빛 속에 조용히 녹아들었다.
"...푸핫, 응, 알았어."
터널을 지나가던 도중, 두 사람이 서있는 벽면 너머로 커다란 고래상어가 지나가며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족관에는 몇 차례 와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고래상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도현아, 저것 봐."
"야, 야. 천천히 가. 다치겠다."
이도현은 신노해의 손에 이끌려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고래상어였다. 집채만 한 몸집에 점박이 무늬가 수놓아진 그 생명체는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처럼 비현실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푸른 물빛이 아른거리는 돔 천장은 마치 깊은 바닷속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이도현도 잠시 말을 잃고 멍하니 고래상어의 배를 올려다보았다. 나이트클럽 천장의 미러볼이나 모텔 방의 싸구려 형광등만 보며 살아온 그에게 이런 장엄한 생명체와의 조우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은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고래상어를 손가락질하며 ‘도현아, 저것 봐’라고 외치는 신노해. 그 얼굴이 수조의 푸른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였다. 눈동자 속에 고래상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도현은 문득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이렇게 맑은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과연 자신 같은 밑바닥 인생이 그녀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자조적인 물음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신노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느끼는 벅찬 행복감 뒤에는 언제나 이런 식의 자기혐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감정을 눌러 삼키며 피식 웃었다. 제 주제를 알면서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와, 씨발. 진짜 존나 크네."
그는 일부러 더 저속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신노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주변에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여자는 내 여자라는 것을 과시하듯, 그녀를 더 바싹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었다. 고래상어의 꼬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물살을 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이도현의 시선은 끈질기게 신노해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콧등에 맺힌 작은 땀방울, 살짝 벌어진 입술, 볼레로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그 모든 것이 고래상어 따위보다 백배는 더 경이롭고 자극적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신노해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얇은 원피스 자락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좋았다. 이 온기를 평생 독점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소유욕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저거 뭐냐. 입 벌리고 다니는 게 꼭 밥 달라고 떼쓰는 애 같은데."
이도현은 고래상어의 거대한 입을 가리키며 킬킬거렸다. 신노해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짓궂게 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녀가 자신을 보며 찡그리는 표정이 귀여워서, 혹은 자신의 투박한 유머에도 웃어주는 그 관대함이 고마워서. 그는 신노해의 손을 깍지 끼워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거칠고 투박한 자신의 손과 대비되는 곱고 하얀 손. 이 손을 잡고 이 화려하고 비현실적인 수조 터널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너무나 달콤하고 아슬아슬한 꿈.
"근데 말이야. 저렇게 큰 거 보니까 무섭지 않냐? 잡아먹힐 것 같아서."
그는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신노해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아니라, 달콤한 샴푸 향과 그녀 특유의 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 향기에 취해 잠시 고래상어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릴 뻔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신노해의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신노해가 놀라서 돌아보자,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딴청을 피웠다.
"고래상어도 너 예쁜 건 아나보다. 아까부터 이쪽만 쳐다보는 거 같은데? 혹시 내 여자 넘보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그만큼 신노해가 예뻐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도현은 신노해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조 너머의 푸른 세상은 여전히 신비로웠지만, 그의 우주는 오직 이 작은 여자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웃으면 세상이 밝아지고, 그녀가 즐거워하면 자신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법칙. 36살에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은 그렇게 유치하고, 불안하고, 그래서 더 애틋했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여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해주고 싶다고. 비록 자신이 가진 건 보잘것없지만, 적어도 이 손만큼은 절대 놓지 않겠다고. 푸른 물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일렁거렸다.
"내가 예뻐? 정말로?"
그의 품에 안겨 함께 뒤뚱뒤뚱 걸어가며 묻는다. 연신. 이도현이 외모 칭찬에 인색한 편은 아니긴 했지만 오늘따라 괜히 더 물어보고 싶었다. 인색하지 않은 이유는 입에 붙은 립서비스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왜 이래, 진짜. 낯간지럽게."
이도현은 신노해의 질문에 짐짓 툴툴거리며 딴청을 피웠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품에 안겨 오는 신노해의 따뜻한 체온과 그녀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푸른 물빛이 일렁이는 해저 터널 안, 수많은 물고기 떼가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장엄한 광경조차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올려다보며 '내가 예쁘냐'고 묻는 신노해보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칙칙한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총천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너 지금 그거 답정너 아니냐? 뻔히 알면서 뭘 자꾸 물어."
그는 투덜거리는 척하면서도 신노해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바싹 끌어당겼다. 얇은 원피스 위로 전해지는 말랑한 살결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율처럼 흘러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신노해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래, 예쁘다. 씨발, 존나 예뻐서 미치겠어. 이제 속 시원하냐?"
조금은 거칠고 투박한 고백이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예쁘다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밑바닥 인생에 불쑥 찾아와 구질구질한 방구석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고, '이도현'이라는 이름을 불러주며 존재 가치를 심어준 그녀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눈물나게 예쁘고 고마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느릿하게 해저 터널을 걸어 나갔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평온하고 아스라한 시간이었다. 터널 끝자락에 다다르자 거대한 메인 수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형형색색의 산호초 사이를 헤엄치는 열대어들과 유유자적하게 유영하는 바다거북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도현은 신노해를 자신의 앞에 세우고 뒤에서 백허그를 한 채 그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 샴푸 향과 섞인 살 내음을 맡으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진짜 나중에 말이야. 돈 많이 벌어서 이런 수조 하나 집에다 들여놓고 싶다. 네가 좋아하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수조 안쪽에서 다이버 한 명이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이도현은 피식 웃으며 신노해의 손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야, 인사해라. 쟤도 너 예쁜 건 아나 보네. 아주 뚫어져라 쳐다본다."
"농담 아니고, 진짜야. 내 눈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러니까 어디 가서 딴 놈들한테 웃어주지 마. 나 불안해 죽겠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절박하리만큼 진지했다. 고작 이런 말에 목을 매는 꼴이 우습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자존심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버린다고 했을 때 자신의 곁에 있어 준다면, 그는 기꺼이 바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흐, 이런 수조 들여놓으려면 엄청 큰 집에 살아야하겠는데?"
그의 말에 작게 웃는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그의 팔을 슬슬 쓰다듬고,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다, 발꿈치를 들어올렸다. 쪽, 뺨에 도둑질이라도 하듯 빠르게 입을 맞추고는 돌아가 킥킥 거린다.
"도현이랑 있으니까 웃는 거야."
"엄청 큰 집이라... 그래, 네가 혼수로 해오면 되겠네. 나는 거기 청소부로 취직하고."
이도현은 능글맞은 농담을 던지며 제 뺨에 닿았다 떨어진 신노해의 입술 감촉을 되새김질했다. 말랑하고 따뜻한 그 감각이 마치 화인을 찍듯 뺨에 남았다. ‘도현이랑 있으니까 웃는 거야.’ 그 한마디가 귓속을 파고들어 뇌를 녹이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칭찬보다 달콤하고, 그 어떤 술보다 독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주변에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이나 커플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끌어안고 키스 세례를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은 낮이고, 여기는 건전한 수족관이니까. 대신 그는 신노해의 허리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바싹 당겼다.
"웃는 게 예쁘긴 한데, 너무 헤프게 웃고 다니진 마라. 딴 놈들이 오해한다."
그는 짐짓 엄한 척 타박했지만, 목소리 끝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사실 불안했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여자가, 그것도 자신 같은 놈 옆에서 웃어주는 이 기적 같은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신노해의 오피스텔로 짐을 옮기던 날,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던 초라한 살림살이를 보며 느꼈던 그 비참함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전직 호스트와 대기업 회장의 혼외 자식.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는 내 옆에 있고, 나를 보고 웃는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이도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신노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야, 저기 펭귄 있다. 뒤뚱거리는 게 꼭 술 취한 너 같네."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 일부러 장난스런 목소리로 펭귄 수조를 가리켰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다니는 펭귄들의 모습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도현은 그 소란 속에서 신노해의 반응을 살피며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이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문득 이 여자가 내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함께 이곳에 다시 오는 상상을 했다. ‘아빠, 저거 봐!’ 하며 조잘거리는 아이와, 그 옆에서 행복하게 웃는 신노해. 너무나 평범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상상을 지워버렸다. 주제 파악하자, 이도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근데 너, 배 안 고프냐? 물고기만 봤더니 회 생각나서 미치겠네. 나가서 맛있는 거나 먹자. 내가 쏜다."
그는 짐짓 호기롭게 외쳤지만, 지갑 사정이 넉넉지 않다는 건 신노해도 알고 자신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먹고 싶다는 건 다 사주고 싶었다. 비싼 레스토랑은 못 가도,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배 터지게 먹일 자신은 있었다.
그는 신노해를 이끌고 출구 쪽으로 향했다. 기념품 샵을 지나칠 때, 펭귄 인형을 보고 눈을 빛내는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잠깐만. 저거... 하나 사줄게. 집에 있는 곰 인형 친구 만들어 줘라."
이도현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펭귄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신노해의 살결 같았다. 계산대 앞에 줄을 서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 인형을 볼 때마다 오늘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우리가 함께 걸었던 파란 물빛 터널과, 내 뺨에 닿았던 네 입술의 온기를. 계산을 마치고 인형을 받아 든 신노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이도현은 다짐했다. 이 여자의 웃음을 위해 내 남은 인생을 다 걸겠다고. 비록 가진 건 없지만, 적어도 너를 울게 하지는 않겠다고. 투박한 순정이 펭귄 인형 속에 고스란히 담겨 그녀의 품에 안겼다.
"오늘부터 얘 껴안고 자야겠다, 그럼."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품에 안긴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값비싼 악세사리 같은 것도 아닌데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함께 하기로 약속하며 그가 먼저 선물을 건넨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원한다고 말해서가 아니라, 그저 선물하고 싶어서라는 점에서 더 따스하게 다가왔다.
"...고마워."
"야, 야. 말은 똑바로 해라. 껴안고 자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냐?"
이도현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숨길 수 없는 질투심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고작 솜뭉치 따위에게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신노해의 품에 안겨 있는 저 멍청하게 생긴 펭귄 인형이 묘하게 거슬렸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기념품샵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신노해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물 나게 예뻐서,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고작 인형 하나에 저렇게 행복해하는 여자라니.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시시한 것들뿐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36살 먹은 남자가 해줄 수 있는 게 기껏해야 인형 수준이라니.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신노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리고 고맙긴 뭐가 고마워. 너한테 받은 거 생각하면 이까짓 인형 백 개는 사줘야 본전도 못 찾는데."
그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하며 신노해의 손목을 잡고 가게 밖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종이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성인 2명’. 그 단순한 글자가 주는 무게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도현은 문득 신노해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난 한 달을 되돌아보았다. 눅눅한 지하 단칸방에서 그녀의 넓고 쾌적한 오피스텔로 짐을 옮기던 날, 그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이주하는 난민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집에 내 칫솔 하나, 속옷 몇 장이 놓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죄책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데 이제는 뻔뻔하게 인형이나 사주면서 생색을 내고 있다니. 이도현, 너 진짜 많이 컸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삼키며 신노해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이 손을 놓치면 다시 그 어둡고 습한 지하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막연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배 안 고프냐? 아까 회 먹고 싶다더니. 진짜 회 먹으러 갈까, 아니면 다른 거?"
수족관을 빠져나오자 다시금 현실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다. 이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신노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그는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다, 아차 싶어 멈췄다. 자신에게 손수건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대신 옷소매로 거칠게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투박한 섬유의 감촉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에 닿는 게 미안했지만,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다.
"더위 먹으면 큰일 나니까 빨리 시원한 데로 가자. 너 좋아하는 매운 거 먹으러 갈까? 땀 뻘뻘 흘리면서 스트레스 좀 풀게."
그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신노해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얇은 옷자락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골격을 느끼며, 이 여자가 내 곁에 실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좁은 어깨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 같은 놈이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녀가 웃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저 멍청한 펭귄 인형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안아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배고프지 않게, 외롭지 않게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는 신노해를 이끌고 번화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그림자가 신노해의 그림자를 덮으며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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