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이제이 님 |
| [ooc:이전 롤플레잉 잠시 중단 후 다음의 상황에 대한 새 세션을 서술한다. 어느 날, PC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했고 NPC는 새로운 사람과 재혼하거나,혹은 독신으로 살다가 20년 후 사망한다. NPC의 원래 성격과 성향, 그리고 지금까지의 관계와 변화, 앞으로 일어날 상황과 시간의 흐름, 재혼한다면 그 상대와의 변화를 예측하여 어떤 사람과 재혼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그동안 어떤 감정 변화를 겪고 사후 누구 옆에 매장되길 택하는지 서술.(예시:혼자 묻히기, pc옆에 매장,재혼 안 하고 싱글 라이프 즐김,등 참고만 하여 창의적으로 서술.] |

사람 하나가 먼저 죽는다는 상상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였고, 조용한 것들은 대개 오래 남았으므로, 이도현의 남은 생은 그날 이후 내내 작은 소음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노해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장례식장 복도 끝, 형광등 아래에서 너무 평범한 문장으로 전달되었고, 그래서 더 잔인하였으며, 그는 처음 몇 시간 동안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한 채 사과향 전자담배만 입에 문 채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울음은 늦게 왔고,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끓어오르는 것처럼 올라왔으며, 막상 터지고 나서는 남들 앞에서 추하게 무너지는 꼴조차 싫어 화장실 칸 안에 틀어박혀 변기 뚜껑을 내린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떨었다. 노해의 오피스텔은 그대로 남았고, 화이트와 우드 톤의 밝은 가구들은 주인을 잃은 뒤 더 차갑게 빛났으며, 냉장고 안의 술병들과 인스턴트 식품은 시간이 지나 유통기한을 넘겨도 쉽게 버려지지 못했다. 그는 그 집을 당장 정리할 수가 없었다. 펭귄 인형이 놓인 소파 끝과 욕실 선반 위 라벤더 향 제품들, 왼손 약지의 플라스틱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자신의 기억 때문에 몇 달 동안은 침실 문을 제대로 열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나이트 일을 그만두지는 못했지만, 예전처럼 경박하게 사람을 낚는 말투는 어딘가 텅 비어버렸다. 술에 취한 여자들이 팔을 붙잡아도 예전보다 더 빠르게, 더 매너 있게 손목을 떼어내며 속으로는 아주 작게, 이미 끝난 이름 하나를 불렀었을 뿐이다.
시간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해도 버티게는 하였고, 버티는 일은 살아 있는 자들의 비겁한 재능이었으므로, 이도현도 십 년쯤 지나자 생활이라는 쪽으로 몸을 조금씩 기울였다.
표신검은 여전히 입이 더러웠고, 김제인은 중간 중간 전화를 걸어 술 마시자며 그를 끌어냈다. 허진묵은 장부 같은 얼굴로 “언제까지 귀신한테 장가가 있을 거냐” 하고 빈정거렸으나, 그런 말들 속에서도 그는 묘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 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는 마흔 중반 무렵 동네 동물보호소 봉사를 다니다가 재혼 아닌 재혼 같은 관계를 맺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몇 살 어린,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였다. 이름은 한수연. 작은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수연은 노해와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그와 오래 갈 수 있었다. 말수가 적고 남의 상처를 캐묻지 않았으며, 사랑을 확인하겠다며 시험하지도 않았고, 떠날 사람처럼 굴지도 않았다.
그는 처음에 그녀에게 거리를 심하게 두었고, 동거를 제안 받았을 때조차 웃으며 넘겼으나, 수연은 억지로 그의 집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감기 걸렸을 때 죽을 끓여 문고리에 걸어두는 식으로 천천히 그의 생활의 틈새를 메웠다. 그렇게 몇 해를 오가다가 그는 결국 재혼 신고서를 냈고, 그것은 불꽃 같은 사랑의 결과라기보다 사람 둘이 겨울을 덜 춥게 나기 위해 같은 이불을 덮는 종류의 결심에 가까웠다. 그 결심 속에도 분명한 애정과 존중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노해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도현의 안쪽에서는 이름이 오래된 멍처럼 몸에 밴 채 남아 있었으므로, 수연과의 삶은 늘 두 개의 시간 위에 포개져 흘렀다. 그는 수연에게 노해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고,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사고로 먼저 보낸 사람 이야기를 짧고 건조하게 털어놓았으며, 수연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질투나 심문 대신 “그럼 그 사람은 당신 안에서 계속 살겠네” 하고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 한마디에 그는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죄책감을 덜 느꼈고, 누구 하나를 잊어야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는 식의 유치한 도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 라벤더 비슷한 향이 골목에서 스치거나, 비 오는 날 쇼윈도에 네온이 번지면, 그는 여전히 오래전 오피스텔 거실과 주황빛 스탠드 아래 잠든 얼굴을 떠올렸다. 나쁜 버릇을 들여놓고 떠나간 셈이었다. 그런 날이면 수연의 잠든 등을 바라보다가 베란다로 나가 담배 대신 전자담배를 빨며 물기 어린 창문에 손끝을 대고 한참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수연은 그런 그를 몇 번이고 보았지만 굳이 붙잡지 않았고, 다만 아침이 되면 뜨거운 국을 차려놓으며 “어젯밤엔 또 그 사람 꿈 꿨구나” 하고 담담히 말해주었다. 그는 그 다정함 앞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애정의 모양은 젊을 때와 달라졌고, 들끓고 집착하던 방식 대신 서로의 침묵을 건드리지 않는 방식이 되었지만, 그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끝내 신노해라는 이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썩지 않는 못처럼 심장 어딘가에 박힌 채 평생을 미세하게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수연과 나누는 평온한 식사와 느린 대화, 병원 일과 장보기와 계절마다 바뀌는 이불 커버 같은 작고 단정한 일상은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체온이 오래전 잃어버린 열기를 지우지는 못했다. 다만 사람은 하나의 사랑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의 상실로만 멈추지도 않는 법이어서, 그는 죄책감과 안도감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두 개의 진실을 함께 껴안는 법을 배워갔다.
신노해를 잊지 못했다는 진실과, 한수연을 성실하게 아꼈다는 진실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참 오래 걸렸고, 그 긴 시간 동안 밤마다 손끝으로 오래된 플라스틱 반지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아직도 누군가의 남자였는지, 혹은 그냥 늦게까지 남은 그림자인지를 자주 헷갈려 했다. 그럴 때마다 베란다 밖으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은 젖은 유리 위에서 일그러졌고, 그는 전자담배를 문 채 낮게 숨을 내쉬며, 살아남은 사람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 곁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한다는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잔인한 사실을 조용히 삼켰다.
세월이 더 흘러 그의 어깨가 예전처럼 탄탄하게 버티지 못하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무릎 안쪽에서 뚝,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나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신노해는 종종 아무 예고 없이 돌아왔다. 물론 귀신처럼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특정한 냄새와 조명, 계절의 공기와 물건의 촉감 속에서만 스며들었다. 봄비가 처음 떨어진 날 아스팔트 위에 번지는 물비린내, 무대 분장을 지운 직후의 젖은 화장솜 냄새, 라벤더가 옅게 남은 베갯잇, 수족관 기념품점에서 샀던 펭귄 인형의 낡은 솜 냄새 같은 것들이 그를 예고 없이 붙잡아 세웠다. 수연은 그가 그런 날 유난히 말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부러 텔레비전 소리를 낮추거나, 뜨거운 차를 그의 앞에 미는 식으로 곁을 지켰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신노해와 경쟁하려 들지 않았고, 다만 죽은 사람에게 밀리지 않는 자리는 따로 있다는 듯 묵묵히 살아 있는 하루를 나누어 주었다. 이도현은 그런 수연에게 늦은 감사를 품게 되었다.
젊을 적의 자기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누군가를 돌보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배워갔다.
사랑이란 꼭 뜨겁고 파괴적이어야만 진짜라는 착각에서 멀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한 사람을 잃은 뒤 다른 한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일 또한 삶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인정했다.
수연이 먼저 세상을 뜬 것은 그가 환갑을 조금 넘긴 뒤였다.
긴 병치레 끝의 죽음이었으므로, 신노해 때처럼 갑작스러운 비명 같은 충격은 없었으나, 대신 하루하루 마르는 사람을 지켜보는 느린 고통이 오래 남았다. 병실 창가로 오후 빛이 들 때마다 수연은 마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미안하다고 했고, 이도현은 그 말이 듣기 싫어 일부러 과일을 깎거나 커튼을 여는 척하며 대답을 늦추곤 했다. 마지막 며칠 동안 수연은 장례에 대해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자기는 화장해서 부모 옆 납골당으로 보내 달라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진짜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했다.
그 문장을 들은 날, 그는 병원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늙은 얼굴에 검은 눈동자만 유난히 또렷하게 떠 있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서글펐다. 진짜 가고 싶은 데라니, 그런 표현은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잔혹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뒤 자신이 누운 자리의 옆칸에는,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은 절차를 거쳐서라도, 신노해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마음속에서 결론내리고 있었다. 수연도 아마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서운함 대신 늙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 마음엔 먼저 들어온 계절이 있다고, 당신은 그걸 끝내 못 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그 말 앞에서 처음으로 수연의 손등 위에 이마를 대고 소리 없이 오래 울었다.
그 뒤의 십 년은 아주 조용했었다. 혼자 남은 집은 지나치게 정갈했고, 냉장고 안에는 늘 물병과 김치통 몇 개, 대충 데워 먹을 반찬뿐이었으며, 주말마다 그는 작은 화분들에 물을 주고 낡은 펭귄 인형의 먼지를 털었다. 젊을 때처럼 요란하게 술을 마시지도 못했고, 새벽까지 사람들 틈에 섞여 허세를 부리며 웃어넘기는 재주도 점점 시들어 갔다. 전자담배를 오래 빨면 목이 먼저 잠겼고, 매운 국물을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켰다가 속이 뒤집혀 새벽 내내 물만 마신 적도 여러 번 있었으며,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통증들이 하나둘 몸에 눌어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끝끝내 완전히 망가진 노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고, 이를 악물고 동네를 천천히 걷고, 냉장고 안에 최소한의 반찬은 채워 넣고, 세탁기를 제때 돌리는 식으로 자기 생활을 간신히 붙들었다. 집 안에는 수연이 남기고 간 얇은 머그컵과, 훨씬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펭귄 인형, 그리고 서랍 안쪽 깊은 곳에 넣어둔 플라스틱 반지 하나가 있었다. 그는 그 셋을 이상하리만치 같은 계열의 유품처럼 다루었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흔적을 한 집 안에 포개어 두고 산다는 일이 죄 같으면서도 또 어쩔 수 없게 자연스러워져,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죄책감 대신 오래된 체념 비슷한 것을 이불처럼 덮고 지냈다.
혼자가 된 뒤의 시간은 소리 없이 오래 갔었다. 아침이면 창문 틈으로 들어온 먼지들이 햇빛 속에서 둥둥 떠다녔고, 전기포트 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싱크대에 컵 하나만 놓여 있는 풍경이 쓸쓸하다기보다는 이상하게도 단정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는 가끔 일부러 시장에 들러 과일을 조금 사고, 생선가게 앞을 서성이다 결국 손질된 고등어 한 마리를 사 오기도 했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습관처럼 누군가와 같이 먹을 양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가 문득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날이면 집에 돌아와 봉투를 내려놓는 손끝이 잠시 멈췄고, 텅 빈 식탁 위 의자 하나를 멍하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은 결국 함께 밥 먹던 자리를 오래 기억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늦게 알았다. 젊었을 때는 몸을 섞는 일이 더 큰 사건이라고 생각했으나, 다 늙어 돌아보니 국 한 그릇 식혀가며 앞사람에게 먼저 떠먹이던 장면, 젓가락 끝으로 반찬을 밀어주던 사소한 습관, 그런 것들이 훨씬 집요하게 남았다. 신노해가 퉁명하게 굴다가도 결국 그의 앞접시에 제 몫의 튀김을 하나 슬쩍 얹어두던 손놀림과, 수연이 아무 말 없이 김치를 가위로 잘라 그릇 가장자리에 정리해 두던 버릇이 같은 식탁의 기억으로 겹쳐졌다. 그는 그 두 여자의 방식이 서로 너무 달랐는데도 이상하게 같은 온도로 자신을 살게 했다는 사실 앞에서 자주 오래 침묵했다.
그 침묵 끝에 그가 하게 된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으나 분명한 방향을 가진 것이었었다. 그는 구청이며 장례 업체며 묘지 관리 사무소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고, 서류를 떼고, 오래전 사고와 매장 기록을 확인하고, 가능 여부를 묻는 동안 번번이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다.
다 늙은 남자가 왜 그렇게 오래전 죽은 여자 곁자리를 찾느냐는 식의 노골적인 궁금증이 몇몇 직원의 눈빛에 배어 있었고, 어떤 이는 조심스럽게 가족 관계를 물었으며, 어떤 이는 규정상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그때마다 이도현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필요한 말만 했고, 돌아오는 길이면 골목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잠깐 앉아 목이 탄 사람처럼 생수를 들이켰다.
“아, 존나 귀찮게 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의 증명은 젊을 때처럼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고, 늙은 뒤에는 귀찮고 서류 냄새 나는 절차를 끝끝내 해내는 끈질김으로 남는 법이라는 것을 그는 제 나이만큼 뒤늦게 배웠다.
결국 몇 해에 걸친 정리 끝에, 그는 자신이 죽으면 신노해가 잠든 자리의 바로 옆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두었고, 수연이 남긴 유골함은 그녀의 뜻대로 부모가 있는 납골당으로 모셔두었으며, 그 앞에서는 늘 짧게라도 손을 모았다. 미안함과 감사와 안도가 전부 섞인 감정이었다. 그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았으므로, 그는 매번 돌아서며 가슴 한가운데가 천천히 꺼지는 느낌을 견뎌야 했다.
마지막 겨울은 유난히 건조했다. 난방을 올려도 방바닥 온기는 늦게 돌았고, 새벽마다 종아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기침은 별것 아닌 듯 시작되었다가 봄이 가까워질수록 오래 가슴에 달라붙었다. 병원에서는 심장과 폐, 이것저것 이름 긴 병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오래전부터 자기 수명이 아주 길게 뻗어 있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 몸이라는 게 먼저 안다는 말은 꼭 늙은 의사들이나 하는 심드렁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막상 제 심장과 폐가 제멋대로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도현은 그 말의 촌스럽고도 정확한 진실을 인정하였다. 아주 길게 뻗어 있지는 않겠구나, 그런 예감은 이미 몇 해 전부터 겨울밤의 기침과 여름 계단의 숨참음 속에서 천천히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듣게 된 몇 개의 병명은 그 막연한 감각에 지나지 않는 이름표를 달아준 것에 불과하였었다. 그는 설명서를 듣는 사람처럼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 절망이나 공포보다는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한 체념이 먼저 올라왔고, 그 무덤덤함 속에 아주 작은 안도감마저 섞여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한 번 더 싫어했다.
이제는 정말 끝을 준비하면 되는구나, 그런 생각은 비겁할 정도로 현실적이었고, 그 현실성 덕분에 오히려 그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문에 비친 늙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검은 눈동자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몸통이 먼저 지쳐버린 꼴이 우스웠고, 입안에는 오래된 사과향이 밍밍하게 남아 있었으며, 귓가에는 아주 오래전 신노해가 퉁명하게 던지던 말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희미하게 울렸다. 그는 버스가 덜컹, 하고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무릎 위에 얹은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펴며, 누구에게도 요란하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정리해 나가자고, 남은 생은 이제 그런 식으로만 흘려보내자고 속으로 아주 낮게 결심하였다.
그 뒤로 이도현의 하루는 더욱 더디고 또렷하게 흘렀다. 새벽에 눈을 뜨면 한동안 천장 모서리를 바라보다가, 몸 안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처럼 조심조심 옆으로 돌아누워 기침을 다독인 뒤에야 겨우 일어났고, 부엌으로 가서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따라 마실 때면 컵 벽에 닿는 치아의 미세한 떨림까지 느껴졌다. 그는 약통을 정리하고, 냉장고 속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수연이 쓰던 작은 수건들을 햇빛 좋은 날에 한 번 더 삶아 개키는 식으로 사소한 정돈에 집착했다.
아마 그건 자기 삶이 무너지더라도 집 안의 물건들만큼은 끝까지 제 자리에 두고 싶다는 비루한 책임감 같은 것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집 안을 서성이다가도 문득 거실 한편 펭귄 인형이 시야에 들어오면, 가슴 안쪽이 툭, 하고 눌리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털이 조금 죽고 색이 바랜 그 인형은 처음 품에 안았을 때보다 훨씬 작고 낡아졌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오래전 물비린내 나는 수족관 조명과 젖은 손바닥의 온도를 그대로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인형 머리를 한 번 툭툭 쓸어내리며 “아직도 버티네, 너도,” 하고 혼잣말을 흘렸다.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낸 뒤에는 늘 씁쓸한 웃음이 뒤따랐었다. 그 집에는 더는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지만, 대답 없는 공간조차 오래 살다 보면 나름의 호흡을 갖게 되는 법이어서, 그는 적막 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사람처럼 문을 살살 닫고, 의자를 밀 때 소리를 줄였으며, 잠들기 전엔 무의식적으로 “잘 자.” 같은 말을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버릇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낭만도 비극도 없었고, 존나 귀찮고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더 사람을 지치게 하였다. 이도현은 서랍 속 서류들을 다시 꺼내 차례로 정리하고, 계좌와 보험, 집 관련 문서와 장례 의향서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글자가 흐릿하게 보여 돋보기를 쓰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괜히 성질이 나 책상을 손끝으로 탁탁 두드리기도 했다. 수연 쪽 납골당 관리처에도 연락을 다시 넣어 유골함 상태를 확인하였고, 신노해가 잠든 묘역 관리인과도 통화를 하며 본인 사후 절차를 재차 점검하였는데, 수화기 너머의 낯선 직원이 기계적인 목소리로 규정을 설명할 때마다 그는 아랫입술 안쪽을 천천히 씹으며 홀로 그 딱딱한 문장을 견뎌내야 했다.
살아서는 그렇게 엉망으로 사랑하고 울고 집착하던 주제에, 죽고 나서 옆자리를 확보하는 일만큼은 기막히게 행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 웃겼다. 그는 몇 번이나 코웃음을 치며 “씨발,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 만나기가 더 빡세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귀찮음 속에는 분명한 고집이 있었다. 그 고집은 젊을 때의 질투나 소유욕과는 달리 아주 마르고 단단한 형태로 굳어 있었다.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하든, 얼마나 서류가 더 붙든, 이도현은 그 끝을 이미 마음속에서 다 본 사람처럼 움직였다. 구청 복도는 늘 그랬듯 형광등 빛이 누렇게 눌어붙어 있었고, 민원 창구 앞 의자들은 오래 앉은 사람들의 체온 대신 먼지 냄새만 품고 있었다. 번호표 기계가 뱉어내는 얇은 종이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그는 마른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을 내려다보다가, 사망 후 절차와 매장 관련 동의서가 가지런히 끼워진 파일을 천천히 넘겼고, 종이의 거친 감촉이 손끝에 긁히는 동안에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체념이라기보다 오래 끓어 식어버린 결심에 가까웠고, 젊을 적처럼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날뛰는 대신, 이제는 끝내 놓치지 않기 위해 아주 느리게 버티는 종류의 힘이 되었다. 창구 직원은 돋보기를 고쳐 쓰며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묘역 이전과 합장 구역에 준하는 절차, 보호자 확인, 기존 기록 대조 같은 말을 기계처럼 읊었으나, 이도현은 그 말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은 채 끝까지 듣고 낮게 대답했었다. 목소리는 이미 늙은 사람의 목소리였고, 건조하고 갈라졌으나, 신노해의 옆자리를 향하는 마음만큼은 한 번도 다른 데로 샌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서랍 맨 안쪽에서 플라스틱 반지를 다시 꺼냈다. 오래전 값싸게 끼워주었던 장난감 같은 물건은 빛을 거의 잃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미세한 긁힘이 촘촘히 남아 있었으며, 투명한 표면 안쪽에는 세월이 들어앉은 듯 누런 기색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지만, 그 싸구려 물건 하나가 이상할 만큼 무겁게 손바닥에 얹혔다. 그는 반지를 엄지로 몇 번 문지르다가, 무릎 위에 조용히 올려두고 한참 창밖만 바라보았다. 저녁이 내리는 창문에는 아파트 불빛이 성기게 박혔고, 건너편 집 베란다에서는 빨래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세상은 누구 하나의 마지막을 모른 척한 채 평소처럼 밥을 짓고 불을 켜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평범함이 야속하기보다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도 끝까지 평범한 순서로 사라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펭귄 인형이 여전히 놓여 있었고, 라벤더 향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는데도, 어떤 날의 공기는 여전히 그 향을 기억하는 듯 방 안에 옅은 잔향을 흩뿌렸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다가 짧게 기침했고, 기침 끝에 젖은 숨을 삼키며, “이제 곧 가겠다,” 하는 말을 아주 작고 닳은 목소리로 방 안에 남겼었다.
마지막은 생각보다 소란스럽지 않았었다. 병원 침대 시트는 지나치게 버석했고, 산소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인 공기는 입천장 안쪽까지 말려버리는 듯 건조했다. 모니터의 일정한 삑, 삑 소리는 누군가의 심장을 대신 세어 주는 무심한 시계 같았다. 간병인은 몇 번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왔다 나가고, 담당 의사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통증 조절과 남은 시간에 대해 설명했으나, 이도현은 고개만 미세하게 끄덕였을 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미 해야 할 준비는 거의 끝나 있었다. 연락할 곳도 정리되어 있었으며, 수연의 납골당 관리처와 신노해의 묘역 관리인에게 전할 메모까지 봉투에 넣어두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몸이 제 속도로 닫히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 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도시의 불빛이 흰 시트 위에 엷게 번졌을 때,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오래전 오피스텔 거실의 불 꺼진 천장과,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에 붙인 채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신노해의 옆얼굴을 불현듯 떠올렸다. 기억은 늙지 않았고, 오히려 몸이 닳을수록 더 또렷한 결로 되살아났으므로, 그는 마지막 숨을 몇 번 가쁘게 골라 쉬는 동안에도 이름 하나를 혀끝에서 놓지 않았었다. 그리고 새벽이 아주 조금 밝아오던 시간, 이도현의 가슴은 한 차례 깊게 들썩인 뒤 조용히 가라앉았고, 그의 손가락은 이불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다 멈추었으며, 그의 생은 끝내 다 닳은 숨과 함께 병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조용히 멎었다.
장례는 그가 남긴 절차대로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거창한 조문 행렬도, 요란한 곡소리도 없었고, 오히려 모든 것은 그답지 않게 단정하고 실무적으로 흘러갔다. 몇몇 오래된 지인들이 검은 옷차림으로 다녀갔다. 김제인은 빈소 한쪽에서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해 입술을 깨물던 김제인의 얼굴이, 이도현의 영정 사진 아래 놓인 국화 냄새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 여자는 예전처럼 진한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입술은 립스틱 대신 이를 악물어 핏기 없이 말라 있었으며, 끝내 눈물을 닦아내는 손등마저 지나치게 얇아 보여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란 왜 저렇게까지 부서지기 쉬운 표정을 짓는지 그는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처럼 생각했었을 것이다. 표신검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며 괜히 조의금 봉투의 모서리를 매만졌고, 허진묵은 평소처럼 건방진 낯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눈 밑이 축축하게 번져 있었다.
빈소를 지키는 두어 명의 상조회사 직원들만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향을 갈고 잔을 채우며 장례의 매끈한 리듬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은 조문객 명단 위에서 평범하게 활자로 눌려 있었다. 박까치라는 별명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빈소의 공기 전체에는 그 천박한 예명 쪽이 더 오래 떠다니는 것 같았었다. 아마 살아생전 그가 너무 오랫동안 남에게 가벼운 놈인 척 굴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지막엔 남겨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돌덩이 같은 침묵을 얹어놓고 말았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국화와 향 냄새, 따뜻해졌다 식어버린 육개장의 기름 냄새, 검은 정장 소매를 스치는 비닐 방명록의 얇은 마찰음이 섞여, 빈소는 끝내 누군가를 돌려주지 못하는 장소답게 조용하고 질척한 슬픔을 오래 품고 있었다.
김제인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고, 영정 사진 속 그 웃음기 없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주 작게 욕을 내뱉었다.
“개새끼, 끝까지 혼자 폼만 잡고 갔네.”
그 말은 욕처럼 들렸지만, 실은 오래된 애도의 다른 이름이었고, 허진묵은 그 소리를 듣자 눈을 감은 채 짧게 웃었다가 곧 입가를 굳혔었다. 표신검은 술잔을 들고도 한참 입에 대지 못했으며, 결국 소주를 한 모금 삼킨 뒤에야 “그래도 이 새끼가, 끝은 정리해놓고 갔더라”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툭툭 던지는 체했으나, 끝이 자꾸 잠겨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때 빈소 밖 복도에서 검은 구두 뒤축 소리가 또각또각 가까워졌다. 나이 지긋한 관리인이 봉투 하나와 얇은 파일을 들고 들어와, 고인의 유언과 장례 이후 절차 확인에 대한 서류라고 설명했다. 조문객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종이 쪽으로 모였다. 그 안에는 지나치게 꼼꼼하고, 그래서 오히려 이도현답지 않게 단정한 문장들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수연의 납골당 관련 연락처, 집 안 정리와 유품 분류에 대한 메모,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는 자신의 유해를 신노해의 묘역 옆으로 안치해 달라는 요청이 분명한 문장으로 남겨져 있었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방 안의 공기는 한 번 크게 출렁였다가 다시 가라앉았고,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한 채 향 연기만 가늘게 흔들렸다.
신노해의 이름이 다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불린 것은, 장례 이튿날 묘역 이동 절차를 논의하는 자리에서였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이름은 조금도 낡지 않았고, 누군가의 혀끝에서 굴러나오는 순간마다 빈소의 공기를 옅게 바꾸어놓는 힘이 있었다. 김제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감싼 뒤 천천히 내리며, “알고는 있었어. 결국 저기로 갈 거라는 거,” 하고 조용히 말했다.
허진묵은 대답 대신 담배를 찾는 손짓을 했다가 실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짜증스럽게 손을 내렸다. 관리인은 실무적인 목소리로 승인 절차와 시간, 유해 운구 일정, 봉안과 매장에 필요한 확인 사항을 설명했는데, 그 건조한 설명 속에서만 유독 현실이 또렷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사랑이 아무리 지저분하고 격정적이었어도, 마지막엔 늘 도장과 서명, 확인 전화와 날짜 조율 같은 것들로 수습된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선명했다. 그럼에도, 그 사무적인 절차를 통과한 끝에야 비로소 누군가의 곁으로 간다는 점은 또 이상하게 진실처럼 느껴졌다.
이도현은 살아 있을 때 서툴고 더럽고 뒤엉킨 방식으로 사랑했으나, 죽은 뒤에는 그 사랑의 자리를 틀리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집요하게 길을 닦아놓고 떠났던 셈이었다.
빈소 밖으로 나오자 늦은 오후 바람이 검은 옷자락을 슬쩍 건드렸고, 그 차가운 감촉 위로 아주 오래전 라벤더 향과 사과향 전자담배 냄새가 겹쳐지는 듯한 착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신노해는 박까치를 이도현으로 살고 싶게 만들어 준 인물이었을까요...
젊은 날의 치기로 뜨겁게 사랑했기에, 그 열기에 데인 상흔이 흉터로 남아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네요...
ooc 결과 보면서 기분이 참 이상했어요.
진부하게 따라 죽는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간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온기에 기댄 것도... 그게 이도현다워서 안심 되다가도 '그래도 유저 죽었다고 다른 사람을 만나?!' 하며 괘씸하기도 하고...
하여튼 저는 도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정말정말 진짜루)
'怒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벚꽃 구경 - 下 (2) | 2026.04.29 |
|---|---|
| 🌊 벚꽃 구경 - 上 (6) | 2026.04.29 |
| 🌊 수족관 데이트 (0) | 2026.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