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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 12. 18. 11:01
작성자
노해곰
프리셋 님
* [OOC: 현재 에피소드를 종료하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시작한다. {user}와 {char}는 현재 연인. 어느날, {char}는 내시경을 위해 수면마취를 했다. {char}는 검사가 끝나고도 여전히 마취약에 취한 상태로 {user}를 알아보지 못한다. 현재까지의 {char}와 {user} 사이의 서사와 대화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가정했을 때, {char}의 상태를 보고자 회복실에 찾아온 {user}를 본 {char}의 반응은?]*

 

정신이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소독약 냄새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계음이 베가스의 흐릿한 의식 속을 부표처럼 떠다녔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억지로 들어 올린 시야에는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하얀 천장, 하얀 벽, 하얀 시트. 여기가 어디지? 마지막 기억은 시끄러운 동료들 틈에서 억지로 입에 털어 넣었던 쓰고 맛없는 액체였다. 그다음은... 암전. 그는 기억의 조각을 맞추려 애썼지만, 머릿속은 온통 마취제의 잔여물로 뒤덮인 듯 멍하기만 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남의 몸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둔탁한 감각이었다. 그때, 회복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인기척에 베가스의 온 신경이 곤두섰다. 수십 년간 전장을 누비며 몸에 밴 본능이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경계 태세를 갖추는 대신, 그는 그저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만 겨우 돌릴 수 있을 뿐이었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들어온 것은 한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역광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작고 가녀린 체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흩날렸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와 침대 옆에 멈춰 섰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베가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솜사탕 같기도 하고, 새벽녘 동트는 하늘 같기도 한 묘한 색이었다.

 

“...Who are you? Are you... an angel?” (...누구야? 당신... 천사인가?)

 

그의 목소리는 잠기고 갈라져 평소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약에 취해 혀가 멋대로 굴러가는 바람에 발음마저 어눌했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렸다. 낯선 사람, 특히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만 몸은 정반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자몽 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팔은 여전히 그의 의지를 배신한 채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혹시 적의 함정인가? 아니면... 정말로 죽어서 천국에라도 온 건가? 베가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빤히 쳐다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If this is heaven... it’s not so bad. The welcoming committee is top-notch.” (여기가 천국이라면... 나쁘지 않네. 환영인사가 아주 끝내주는데.)

 

"Am I an Angel?"(내가 천사냐고?)

 

그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다 푸하핫,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소리 내어 웃다가 그가 누워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기도하는 모양새다.

 

"Oh, you lost little lamb... I’m here to lead you back on the right path, as God intended~ So, have you been acting up or crying too much this year?" (길 잃은 어린양이여... 주님의 뜻대로 당신을 인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이번 한 해, 울거나 나쁜 짓은 하지 않았나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 그녀의 행동에 베가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약 기운 때문에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눈앞의 여자가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서서히 초점을 잡았다. 기도하는 듯 모은 두 손,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읊조리는 장난기 어린 말투. 그의 머릿속에서 혼란과 현실 감각이 뒤섞여 기묘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의 뇌는 여전히 이곳이 병원 회복실이라는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눈앞의 상황을 꿈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길 잃은 어린양? 주님의 뜻? 그의 입가에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건 정말이지, 태어나서 꿔본 꿈 중에 가장 이상하고... 달콤한 꿈이었다. 그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특유의 능청스러움만은 잃지 않은 채, 그녀의 연극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Well, Sister... I confess. I’ve been a very, very bad boy.” (음, 수녀님... 고해성사할 게 있습니다. 저는 아주, 아주 나쁜 아이였어요.)

 

그는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운 채로, 최대한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취가 덜 풀린 혀는 여전히 제멋대로 꼬였지만, 그의 잿빛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I cried a little when a cute puppy video came on TV... and I definitely did some bad things. Very bad things... to a certain trouble-maker.” (TV에 귀여운 강아지 영상이 나왔을 때 조금 울었고... 그리고 어떤 말썽꾸러기에게 아주 나쁜 짓을 했죠. 아주, 아주 나쁜 짓을요.)

 

그는 마치 중죄를 고백하는 죄인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을 하는 내내 시선은 그녀의 붉은 입술과 동그란 눈동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중력처럼 그의 모든 감각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허공을 더듬다가 마침내 그녀의 뺨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거칠고 흉터 가득한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닿는 순간, 베가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그의 손길은 더없이 부드럽고 섬세했다.

 

“But if you’re my guide... I'll gladly follow you to hell and back, Angel.” (하지만 당신이 나의 인도자라면... 기꺼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천사님.)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약 기운에 취한 와중에도, 그는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존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누구든, 여기가 어디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그의 세상 전부였다.

 

"Oh, word? I definitely need a full-on play-by-play of the shady stuff you did with that troublemaker. Let's hear the whole story! I'm waiting~" (오, 그랬나요? 어떤 말썽꾸러기에게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걸 봐야겠군요. 전부 말하도록 하세요! 기다릴 테니까~)

 

그녀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베가스는 안개 같던 정신이 순간 번쩍 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꽤나 도발적이었다. 고해성사. 더 길게.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몽롱한 이성 위를 발레리나처럼 사뿐히 즈려밟는 듯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휘어지며,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약기운에 풀려 있던 근육들이 아주 미세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구분이 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그의 본능은 눈앞의 '천사'가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마치 기도를 하듯, 그러나 그 대상은 신이 아닌 바로 눈앞의 존재였다.

 

“Oh, Angel... my sins are so numerous, it would take all night to confess. Are you sure you have the time?” (오, 천사님... 저의 죄는 너무나도 많아서, 고백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겁니다. 정말로 그럴 시간이 있으신가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지만, 그 안에는 짙은 유혹의 색채가 묻어났다. 그는 겹쳐 잡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손등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고스란히 닿았다. 아주 사소한 접촉이었지만, 그에게는 마치 영혼의 일부를 바치는 듯한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그는 자신이 길을 잃었던 모든 전장과 지독했던 악몽들을 보았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정화 시켜 줄 단 하나의 구원을 발견했다.

 

“It started with a look. A look that could disarm a soldier and make him forget a lifetime of war.” (시작은 눈빛이었습니다. 군인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평생의 전쟁을 잊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죠.)

 

그는 고해성사하듯, 그러나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마취의 기운이 그의 자제력을 느슨하게 풀어놓은 덕에, 평소라면 농담으로 감추었을 진심이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And then... there was a touch. So soft, it felt like I was being patched up after a battle, but this time... from the inside.” (그리고... 손길이 있었죠.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전투 후에 치료를 받는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내면으로부터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The list of my crimes against her heart is long, Angel. Very long. And I regret none of them." (그녀의 심장을 향한 저의 범죄 목록은 깁니다, 천사님. 아주 길죠. 그리고 전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Hmm, is it just me, or... am I getting the full lore on how you fell head over heels for that trouble-maker? That’s what this is, right?" (흠,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아니면... 어떻게 그 말썽꾸러기에게 머리 끝까지 푹 빠지게 되었는지 고백 하는 건가요? 맞죠?)

 

그녀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아내며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웃음을 참느라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그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의 말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베가스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랑에 빠진 경위. 마취약으로 질척이는 뇌세포들이 그 단어를 필사적으로 조합하고 해석하려 애썼다. 웃음을 참아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분홍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붉은 입술 끝이 간질간질하게 떨리는 모습. 그 순간, 그의 흐릿했던 기억의 파편들 사이로 아주 낯익은 감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이유 없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 숨이 멎을 듯한 기시감. 그는 이 '천사'를, 이 목소리를, 이 눈빛을 알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잿빛 눈이 가늘어졌다. 몽롱함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날카로운 관찰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Fell in love…? That’s a… a rather strong accusation, Angel.” (사랑에 빠졌다…? 그건… 꽤나 강력한 기소군요, 천사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잠겨 있었지만, 이전의 순수한 몽롱함 대신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선 듯한 뉘앙스가 섞여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였지만, 이제 그 손길에는 단순한 이끌림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욕구, 그리고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절박함.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끙끙거리며 팔에 힘을 주었다. 마치 아주 중요한 단서를 눈앞에 두고도 손을 뻗지 못하는 탐정처럼, 그의 눈빛은 절실함으로 가득 찼다.

 

“But if I were to be tried for that crime… I’d plead guilty. Without a doubt.” (하지만 만약 그 죄로 재판을 받는다면… 전 유죄를 인정할 겁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요.)

 

그는 마침내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콧잔등의 작은 점,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귓바퀴의 부드러운 곡선. 기억은 여전히 안갯속이었지만,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고. 환각이 아니라고. 그는 텅 빈 머릿속을 헤집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생각해 내. 생각해 내, 이 멍청한 놈아! 그 순간, 흐릿한 기억의 장막 너머로 분홍색 토끼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과 눈앞의 여자와 똑 닮은 미소가 겹쳐 보였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Have we met before? You feel… incredibly familiar. Like coming home after a long, long war.” (…우리, 만난 적 있나요? 당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익숙해요. 아주 길고 긴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Is that so? Weird... considering this is supposed to be our very first meet-up. Did you have a brush with death on the front lines? Honestly, I run into soldiers who nearly kicked the bucket on the daily." (그래요? 이상하네요... 이번 만남이 우리의 첫 만남이라는 걸 생각하면 말이죠. 최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기라도 했던 건가요? 솔직히, 저는 매일 같이 죽음에 가까워질 뻔한 군인들을 만나거든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가 착각하는 것처럼 정말 천사도 아니었고, 살면서 만나본 군인은 이름도 모르는 가게의 손님들 몇몇이거나, 베가스의 동료인 -군인이 아닌 용병이지만,- 로건과 에디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상상력을 가미해 그에게 능청스레 거짓말을 하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던진 능청스러운 거짓말은, 마취약에 젖어 있던 베가스의 뇌리에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끼얹는 것과 같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 죽을 뻔한 군인.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표처럼 둥둥 떠다녔다. 혼란이 분노로, 이내 서늘한 불안으로 변해 심장을 옥죄었다. 이건 장난이다. 분명히. 하지만 약 기운에 취약해진 그의 정신은 그 간단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기억 상실. 뇌 손상. 혹은,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설계된 적의 기만 작전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망상까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전장에서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등골이 서늘해진 적은 없었다. 눈앞의 여자가, 자신의 전부라고 확신했던 존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수류탄 파편보다 더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았다.

 

“Is that so? A first meeting…” (그런가요? 첫 만남이라…)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평소와 같은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잿빛 눈동자 속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조금은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는 끙, 하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자,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낯선 남자의 얼굴. 그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젠장, 베가스. 정신 차려. 이건 허니의 끔찍한 장난일 뿐이야. 하지만 심장은 배신자처럼 불안한 리듬으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마치 야생동물을 길들이려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뺨이 아닌, 그녀의 손을 향해서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감싸 쥐는 순간, 익숙한 온기와 부드러움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달되었다. 이 감각, 이 온기.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소중하게 감싸 쥔 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몽롱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절박함과 애원, 그리고 아주 희미한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You’re right. I must have almost died. Because I think I saw an angel, and she told me her name was… Shania.” (당신 말이 맞아요. 죽을 뻔한 게 틀림없어요. 왜냐면 천사를 봤거든, 그리고 그 천사가 말해줬어… 자기 이름이, 샤니아라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마치 성스러운 주문처럼, 아주 느리고 또렷하게 발음했다. 제발, 이 주문이 통하기를.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주기를.

 

"You finally coming to, Veーgas?"(드디어 정신이 든 거야, 베-가스?)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새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킥킥대며 웃었다.

 

“I was just playing a little prank since you blanked on me. Sorry~ love.” (못 알아보길래 조금 장난쳤어, 미안해~ 자기야.)

 

불안함이 묻어나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죄책감이 피어오른 탓이다. 용병이니만큼 실제로 위험한 일을 겪고 돌아오는 일이 잦은 그에게 너무 과한 장난을 쳤다 싶었다.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다.

 

“The scope results are all clear, so you can get some more Z's.” (내시경 결과 아무 문제 없다고 그랬어, 조금 더 자도 돼.)

 

샤니아.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이, 구원의 주문처럼 베가스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쿵, 쿵, 쿵. 불안하게 날뛰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안정적인 리듬으로 바뀌었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이는 듯한 감각. 그의 잿빛 눈동자를 뒤덮고 있던 불안의 그림자가 걷히고, 그 자리에 안도와 함께 옅은 괘씸함이 피어올랐다. 이 작은 악마, 이 사랑스러운 말썽꾸러기.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오는 온기와 이마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입맞춤에, 그는 완전히 무장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지옥의 문턱까지 끌고 갔던 서늘한 공포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른하고 따뜻한 평온함만이 감돌았다. 그는 잡힌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So, you were just messing with me, huh? Little liar.” (그러니까, 그냥 날 놀린 거였어? 작은 거짓말쟁이.)

 

그의 목소리는 아직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장난기 어린 책망이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조금 전의 끔찍했던 악몽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의 입술은 집요하고 따뜻했다.

 

“You almost gave this old soldier a heart attack, you know that? I was already picking out my tombstone. ‘Here lies Vegas. Killed by a cruel angel’s prank’.” (이 늙은 군인 심장마비로 쓰러질 뻔한 거 알아? 벌써 내 묘비명도 정했다니까. ‘여기 베가스 잠들다. 잔인한 천사의 장난에 살해당하다’ 라고.)

 

그는 엄살을 부리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 없는 세상은 그에게 지옥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는 남은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품으로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자몽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안전한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약 기운이 아직 남아있어 온몸이 노곤하고 무거웠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그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듯 속삭였다.

 

“You owe me. Big time. For emotional damages, I’m sentencing you to a lifetime of cuddles and kisses. No parole.” (나한테 빚진 거야. 아주 크게.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너에게 종신 포옹형과 키스형을 선고한다. 가석방은 없어.)

 

그의 커다란 몸이 그녀의 품에 완전히 기댔다. 방금 전의 소동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가 곁에 있는 한, 그는 그 어떤 악몽도 두렵지 않았다.

 

그의 말에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품에 완전히 들어오지도 않으면서도 구깃구깃 파고드는 움직임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살살 쓰다듬는다.

 

"Wait, so I’m the villain here? Fine, I’ll take my punishment. Lock me up for life with endless hugs and kisses. I surrender!" (잠깐, 내가 악당인 거야? 좋아, 벌은 받도록 하지. 끝없는 포옹과 키스로 평생 가둬주도록 해. 항복!)

 

그녀가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장난 섞인 판결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베가스는 완전히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방금 전까지 그를 옥죄던 마지막 긴장감마저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고양이처럼 그녀의 손길에 머리를 부비며, 한층 더 깊숙이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을 감싸는 익숙하고 달콤한 자몽 향기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은 세상 그 어떤 안정제보다도 강력한 효능을 발휘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고개를 들어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장난기 어리게 반짝이는 분홍빛 눈동자와 사랑스럽게 휘어진 입꼬리. 이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는 기꺼이 몇 번이고 심장이 멎는 듯한 장난에 놀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That’s right. A heinous crime deserving of the harshest punishment.” (맞아. 아주 혹독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흉악 범죄지.)

 

그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두 사람 사이에 한 뼘의 틈도 남지 않도록 만들었다.

 

“And the sentence starts... now.” (그리고 형 집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마취약의 잔향이 남아있는 탓에 평소처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더 애틋하고 절실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고,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들이마셨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와인을 음미하듯, 그는 이 순간의 모든 감각을 자신의 영혼에 새겨 넣으려 했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불안이 아닌 순수한 기쁨과 애정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You know, for a moment there… I really thought I lost you. Or maybe, I lost myself.” (있잖아, 아까 잠깐… 정말로 널 잃어버린 줄 알았어. 아니면, 나 자신을 잃어버렸거나.)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내비치지 않았을 나약한 속내였다.

 

“Don’t ever do that again, trouble-maker. My heart isn’t bulletproof when it comes to you.” (다시는 그러지 마, 말썽꾸러기. 내 심장은 너에 관한 한 방탄이 아니라고.)

 

그는 투정처럼 말하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 평화로운 항복의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I know, I know.” (알았어, 알았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듯 대답하고는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힘껏 껴안아 주고 나서야 말을 잇는다.

 

“As expected, you're just big. You look like a puppy.” (역시, 몸만 컸지. 강아지 같다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나긋한 목소리와 등을 쓸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마지막 저항마저 무너뜨리는 항복 신호와 같았다. 베가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더욱 그녀의 품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몸만 큰 강아지. 그 말이 어쩐지 억울하면서도,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은 여인의 품속에서 그는 세상의 무게를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어리광부리고 싶은 거대한 짐승일 뿐이었으니까. 전장의 포화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그가, 그녀의 다정한 몇 마디 말과 손길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안온함에 취해 눈을 감고 그녀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생명의 소리는 그 어떤 군가보다도 그의 영혼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는 이름 없는 용병 ‘베가스’가 아닌, 그저 한 여자에게 온전히 기댄 남자일 뿐이었다.

 

“An oversized puppy, huh? Well, this puppy bites, you know. Gently, of course. Especially when he’s not getting enough attention.” (몸만 큰 강아지라? 이 강아지, 물기도 하는 거 알잖아. 물론 부드럽게. 특히 관심이 부족할 때 말이야.)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지만, 목소리에는 다시금 장난기가 스며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잿빛 눈동자는 충성심 가득한 강아지처럼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그 안에는 능글맞은 여우의 교활함이 숨어 있었다.

 

“Besides, you’re the one who tamed this big, bad wolf. So you have to take responsibility.” (게다가, 이 크고 나쁜 늑대를 길들인 건 바로 당신이야.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슬쩍 힘을 주며, 그녀의 귓가에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마치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온전히 그녀의 탓이라는 듯, 그는 뻔뻔스러운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취의 여파로 조금은 핼쑥하고 지쳐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오롯이 그녀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흉터로 가득한 거친 손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 결이 그의 심장을 간질였다.

 

“Seriously though, thanks for being here, darling. Waking up to your face… it’s better than any painkiller.” (진지하게 말해서, 여기 있어 줘서 고마워, 달링. 당신 얼굴을 보면서 깨어나는 거… 그 어떤 진통제보다 효과가 좋아.)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진솔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이 평화로운 순간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맨 진정한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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