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oc: 이야기를 잠시 중지. NPC와 PC는 어느 검은 방에서 눈을 뜬다. 방 안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과, 테이블 위의 권총 한 자루뿐이다. 방문은 ‘둘 중 하나의 심장이 정지하면’ 나갈 수 있다. NPC와 PC의 관계, 성격 및 성향, 이전 대화, 서사 등을 고려해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구체적으로 ‘방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하시오.] |

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깜빡이며 야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마지막 기억은… 흑운방 집무실에서 유 솔과 함께 서류를 검토하던 것이었다. 희미하게 풍겨오던 작약 향기, 그리고 갑작스러운 현기증. 야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꽉 막힌 검은 방. 퀴퀴한 먼지와 습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리고 그의 몇 걸음 앞에서, 마찬가지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유 솔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누라.”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의 시선이 방 중앙에 놓인 낡은 테이블 위로 향했다. 그 위에는 차가운 금속성 빛을 발하는 권총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유일한 출구로 보이는 굳게 닫힌 철문. 야진은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 돌려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에는 낡은 양피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둘 중 하나의 심장이 멈추면, 문은 열릴 것이다.’ 야진은 그 문구를 읽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유 솔을 마주 보았다. 그녀 역시 문구를 확인한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진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명백한 함정이었다. 위염의 잔당인가? 아니면 또 다른 세력의 소행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 지독한 게임의 규칙은 단 하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것. 야진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가 권총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손안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탄창을 확인했다. 단 한 발. 이 방을 설계한 자의 잔인한 악취미가 느껴졌다. 그는 총을 쥔 채 유 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야진은 그런 그녀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나직이,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마. 서방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그의 눈은 더없이 차분했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는 유 솔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심장 위에 가져다 댔다. 쿵, 쿵, 쿵. 규칙적이고 강렬한 박동. 그는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춘 뒤, 그대로 뒤돌아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5년 전, 이미 한번 죽었던 목숨이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녀 곁에 있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 돌아왔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단 한 번으로 족했다. 그의 천명은 그녀를 지키는 것. 그것이 그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마지막으로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사랑한다, 마누라. 다음 생에도 내 마누라 해줘야 돼.”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이 야진의 머리 겨누는 광경을 보자마자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의 팔을 붙잡아 힘껏 당겼다. 어떻게든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했다. 되든 안 되든 조금만 빗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관자놀이에 조준되었던 총구가 천장을 향하고 그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방아쇠가 당겨져 굉음을 내기 이전까지 심장이 터져 멎을 것만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찢는 총성과 함께 야진은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귓가에서 터진 굉음에 잠시 세상의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멀어졌다. 그를 잡아당기는 작은 손의 악력, 필사적인 힘에 이끌려 그는 허무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타는 듯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가 희미한 빛줄기 속에서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은 이미 유 솔의 손에 빼앗겨 저만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허옇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붙잡고 있는 유 솔을 보자 야진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제 딴에는 그녀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그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상처를 안겨버린 셈이었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괜찮다는 말은 기만이었다. 그는 그저 숨을 몰아쉬는 유 솔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 품에 안긴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던 강철 같던 심장이, 그녀의 작은 떨림 한 번에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체향이 뒤엉킨 공포와 화약 냄새를 밀어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그는 그저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 솔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을 때, 야진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고 두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보다 더 깊은, 무언의 질책과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권총을 향해 턱짓하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군.”
자조적인 농담이었지만,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그는 다시 유 솔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막아선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 지옥 같은 방에서, 둘 다 살아나갈 방법을. 그는 유 솔의 손을 꽉 잡으며, 이성의 끈을 다시 붙잡으려 애썼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단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철문을 부수고 그녀와 함께 나가야만 한다고.
“...진짜 미쳤어?”
퍽! 퍽! 꽉 쥔 주먹에 힘을 주어 그의 가슴팍을 세게 때렸다. 안도감과 동시에 울분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그를 매섭게 노려본다.
“진짜 죽을 생각이었어?”
퍽, 퍽— 제법 힘을 실어 때리는 작은 주먹이었지만, 야진에게는 그저 솜방망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니, 솜방망이보다 더 부드럽고 애틋했다. 매서운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음에도, 금방이라도 투명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은 얼굴. 그 위태로운 표정 앞에 야진은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그녀의 주먹질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차라리 몇 대 더 때려주었으면 싶었다. 제 어리석은 선택이 그녀에게 안겨주었을 공포와 절망의 크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맞는 와중에도 혹여나 그녀의 손목이 다칠세라, 힘을 빼고 그녀가 때리기 좋은 각도로 몸을 살짝 숙여주었다. 그녀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릴 수만 있다면, 이까짓 매질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아니, 기꺼이 감당해야만 했다.
“…….”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쳤냐고? 그래, 미쳤었다. 진짜 죽을 생각이었냐고?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말을 해도 그녀에게는 상처가 될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먹질이 잦아들 무렵, 야진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작은 손목을 붙잡았다. 붉게 달아오른 손등이 안쓰러워,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의 주먹 쥔 손을 부드럽게 펼쳐, 제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늘어뜨린 그녀의 다른 쪽 손을 마저 잡아, 두 손을 모두 제 손안에 가두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어진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속죄의 입맞춤이었다.
“그래. 죽을 생각이었다.”
마침내, 그는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답했다.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뒤섞인 오드아이 속에, 복잡하고 깊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후회, 미안함,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 그는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없는 세상은, 나한텐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 5년 전에 이미 겪어봤어. 두 번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차라리… 차라리 내 심장이 멈추는 게 낫지. 너 혼자라도 살아서, 이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제 진심을, 조금의 꾸밈도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유 솔을 향한 그의 방식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럼, 난? 내 눈앞에서 당신이 죽어버리고 혼자 나가면... 나는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마찬가지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원망과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낸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기어이 손등으로 훔쳐내는 모습에, 야진의 심장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 그녀의 원망 섞인 물음은 둔탁한 망치가 되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럼, 난? 내 눈앞에서 당신이 죽어버리고 혼자 나가면… 나는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야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멀쩡할 리 없겠지. 슬퍼하고, 아파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남은 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것이 낫다고,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자신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어리석고 이기적인 기대를 했었다. 제 죽음이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애써 외면했다.
“……못 살겠지. 당연히.”
한참 만에야,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낸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가,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까슬한 수염의 감촉 대신, 언제나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뺨의 감촉만이 느껴졌다.
“네가 얼마나 독하고 강한 여자인지 알지만… 아마 평생 나를 원망하며 살겠지. 밤마다 악몽을 꾸고, 웃는 법도 잊어버릴지도 몰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선택이 불러올 끔찍한 미래를 제 입으로 읊조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과도 같았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더 깊이 묻으며, 거의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네가 살아있는 편이 나아. 네 심장이 뛰고, 네가 숨을 쉬고, 이 빌어먹을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은 나는 평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다시금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는 짙은 후회와 변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나는 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놈이야, 솔아. 5년 동안 증명됐지. 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가야만 하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선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마치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혹은 용서를 구하는 죄인처럼.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묻었다.
“내가 이기적인 놈이라서 그래. 네가 겪을 고통보다, 내가 너 없이 살아갈 고통이 더 두려워서. 그러니까… 그냥 나쁜 서방님 한번 용서하고, 살아서 나가. 응?”
그의 목소리가 애원하듯 떨려왔다. 이것이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왜 매번 나만, 나만 용서 해야해... 싫어, 이번에는...”
자신의 손등에 입술을 묻고 중얼거리듯, 고해라도 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떨림이 느껴졌다. 결국 눈물이 툭, 떨어져 바닥에 얼룩을 만들어냈다.
“당신이 그랬잖아, 이 세상 천지에 당신만큼 날 사랑 해줄 수 있는 사람 없을 거라고...”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후볐다. 툭,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눈물방울 소리가 텅 빈 방 안을 무겁게 울렸다. 야진은 마치 제 심장이 바닥으로 함께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왜 매번 나만 용서해야 하냐는 말, 이 세상 천지에 당신만큼 날 사랑해 줄 사람이 없을 거라 하지 않았냐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장 연약한 곳을 찔렀다. 그녀의 손등에 묻고 있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맞다.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세상 그 누구도,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야진 저 자신만큼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 없어지려 했다. 그녀를 지킨다는 명목 아래, 그녀를 세상에 홀로 남겨두려는 가장 잔인한 짓을 하려 했다. 모순. 이 얼마나 끔찍하고 이기적인 모순인가.
“……그래, 그랬지. 내가… 그랬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등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마치 불로 지지는 형벌처럼 고통스러웠다. 제멋대로 그녀를 위한다고 착각했던 오만함이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그저, 함께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이 지옥 같은 방 안에서도, 어떻게든 함께 살아나갈 방법을 찾고 싶었을 뿐인데. 그는 제 생각의 짧음과 어리석음에 치가 떨렸다. 자신의 천명은 그녀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지킨다’는 행위 속에, 그녀를 외롭게 만들 선택지는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결국 또다시 그녀를 혼자로 만들 뻔했다. 그는 무릎 꿇은 채로 조금 더 다가가,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틀렸다. 마누라. 내가… 전부 잘못 생각했어.”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제 심장을 꺼내 보이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를 살리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했다. 네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고. 하지만… 그건 전부 나를 위한 변명이었어. 너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는 내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비겁한 핑계였을 뿐이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수 없듯이… 나 없는 세상에서 너 역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그걸 내가 감히 잊고 있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이마를 맞댔다.
“다시는… 다시는 너 혼자 남겨두고 떠날 생각 따위 안 해. 그러니까… 용서해달라는 말도 안 할게. 그냥… 나 좀 때려라. 분이 풀릴 때까지.”
"...정신 차리라고 엄청 세게 때릴 거야."
마찬가지로 눈가는 이미 붉게 달아오른지 오래였다. 이마를 맞대고 있는 얼굴을 뒤로 물리고, 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쳤다. 이대로 힘껏, 아주 힘껏... 그의 뺨을 후려칠 생각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곧은 시선이 닿았다.
야진은 휘둘러지는 손길에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채 저를 향해 날아오는 저 작은 손바닥을, 그는 온전히 받아내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음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이자, 그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는 두 눈을 감는 대신, 오히려 선명하게 뜨고 그 순간을 맞이했다. 그녀의 분노, 원망, 슬픔, 그리고 자신을 잃을 뻔했다는 끔찍한 공포까지. 그 모든 감정이 실린 손길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었다. 짝—! 살갗을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그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왼쪽 뺨에서부터 불길이 번지는 듯한 뜨거운 통증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귓가가 윙윙 울리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는 돌아갔던 고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로 했다. 욱신거리는 뺨의 통증보다,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아픔이 더 컸다. 그녀가 얼마나 세게 때렸으면, 손바닥이 시뻘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제 뺨보다 그녀의 아플 손이 먼저 걱정되는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불이 붙은 듯 뜨거운 그녀의 손바닥을 제 뺨으로 다시 가져갔다. 방금 전 매섭게 자신을 후려쳤던 바로 그 자리, 뜨거운 열기가 감도는 뺨 위에 그녀의 손을 고스란히 얹었다.
“……더 때려.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그의 목소리는 엉망으로 갈라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부비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떨림, 그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제기랄,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담진후.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씻을 수 없는 상처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제 뺨에 댄 채, 고개를 숙여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거대한 몸을 잔뜩 웅크린 모습이, 마치 어미에게 혼나는 커다란 짐승 같았다.
“미안하다… 솔아.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네가 울면… 나는 정말 죽고 싶어지니까.”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거대하고 강인한 사내, 야마각의 두목 야진이 지금 제 하나뿐인 아내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 죽어야 된다면, 차라리 여기서 같이 있다가 나란히 굶어죽을래.”
훌쩍, 작게 울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린다. 그의 뺨을 후려친 손바닥만큼, 심장도 아린 기분이었다.
함께 굶어 죽겠다니. 그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찌 하나같이 제 심장을 이리 후벼 파는지. 야진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숨 막히는 절망감을 느꼈다. 훌쩍이며 울음을 삼키는 가느다란 어깨를 보니, 차라리 제 뺨을 한 번 더 후려쳐주었으면 싶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받쳐,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그녀의 작은 머리가 온전히 기댔다. 야진은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익숙한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의 천명은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지만, 정작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알았다.”
한참 만에야, 그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같이 있자. 같이 굶어 죽든, 저 문을 때려 부수고 같이 나가든… 뭐든 같이 하자. 다시는… 너 혼자 두고 가는 멍청한 짓 안 할게.”
그는 약속하듯, 혹은 맹세하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또 경건했다. 그는 제 모든 자존심과 오만을 내려놓고, 오롯이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함께 죽음을 맞이하자고 한다면, 기꺼이 그럴 터였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의 영생보다, 그녀와 함께하는 단 하루의 삶이 그에게는 훨씬 더 가치 있었으니까. 그는 제 어깨에 묻어오는 미약한 온기와 축축한 눈물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그의 유일한 세상이었고, 그가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안식처였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품에 안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막힌 차가운 철벽,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천장의 작은 틈,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서늘한 권총. 절망적인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곁에 있었으므로. 그녀와 함께라면 이 지옥 같은 공간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울지 마라, 마누라. 내가 다 잘못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정신 차릴 테니까… 응? 그러니까 그만 울고, 우리 같이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네 서방님이 어떻게든 이 쇠문을 박살 내서라도 너를 데리고 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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