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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6. 5. 15. 15:42
작성자
노해곰

 

화학 실험실의 문을 열자 매캐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고, 백발이 성성한 앤더슨 선생님의 지루한 설명이 나른한 오후의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베가스는 일부러 요란하게 문을 닫으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앤더슨 선생님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은 그는, 교실을 천천히 훑었다. 저기, 창가 맨 앞자리에 범생이처럼 앉아 있는 녀석이 바로 로렌스였다. 베가스는 보란 듯이 로렌스의 바로 뒷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로렌스가 잠시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베가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자리 의자를 발로 툭, 찼다.

 

“Hey, Mr. President. (어이, 회장님.)”

 

그는 나른하게 몸을 뒤로 젖히며, 로렌스의 귓가에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Planning on asking someone to the prom? You should aim higher. Or maybe, you should just stay out of it. (프롬에 누구한테 파트너 신청할 계획이라도 있으신가? 좀 더 높은 곳을 노리는 게 어때. 아니면아예 끼어들지 말든가.)”

 

베가스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가며 비웃음인지 미소인지 모를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화학약품 냄새가 섞인 공기를 가르고 로렌스의 귓가에 뱀처럼 스며들었다. 앞자리에 앉은 로렌스의 어깨가 순간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재미있다는 듯, 베가스는 발로 의자를 한 번 더 툭, 걷어찼다.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이고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교실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와 함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앤더슨 선생님의 신경질적인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지만, 베가스는 그 모든 것을 배경음악처럼 흘려들을 뿐이었다. 지금 그의 세상은 오직 앞자리에 앉은 타겟, 로렌스 노아에게로 잔혹하게 좁혀져 있었다. ‘샤니아는 내 거야.’ 라고 온몸으로 뽐내고 있는 것 같았다.

 

로렌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당혹감과 불쾌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베가스에게 속삭였다.

 

“What are you talking about, Vegas? It's disturbing your class.”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베가스? 수업에 방해되잖아.)

 

그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에 베가스는 오히려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방해?’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로렌스의 얼굴을 빤히 뜯어보았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인기 많은 학생회장. 샤니아가 좋아할 법한 요소는 다 갖춘, 아주 거슬리는 녀석이었다. 베가스는 몸을 앞으로 숙여, 로렌스와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그의 커다란 덩치가 로렌스의 책상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Oh, my apologies, Mr. President. Did I hurt your precious study time? I’m just giving you a friendly piece of advice.” (, 실례했네, 회장님. 너의 소중한 공부 시간을 내가 방해했나? 그냥 친구로서 충고 한 조각 던져주는 것뿐이야.)

 

베가스는 책상 위에 있던 로렌스의 화학 교과서를 집어 들어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팔락거렸다. 그의 시선은 책이 아닌, 여전히 로렌스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Some flowers are too beautifuland too dangerous to pick. (어떤 꽃들은 너무 아름다워서꺾기엔 너무 위험하거든.)”

 

그는 일부러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샤니아를 암시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You might get pricked. Badly. (가시에 찔릴지도 몰라. 아주 심하게.)”

 

베가스는 팔락거리던 책을 !’ 소리가 나게 덮어버렸다. 그 소리에 로렌스의 어깨가 다시 한번 움찔했다. 베가스는 씩 웃으며 책을 로렌스의 가슴팍에 툭 던져주었다.

 

“Think about it. (잘 생각해봐.)”

 

그는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 교실에 볼일은 없었다. 다음 타겟은 풋볼 연습 중일 루시안 맥이었다. 운동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맹렬한 투우사의 그것처럼, 망설임 없이 단호하고 위협적이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이미 다음 사냥감을 포착한 듯, 차갑고 뜨거운 불꽃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화학 실험실을 나선 베가스의 발걸음은 곧장 드넓은 운동장을 향했다. 쨍한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녹색 잔디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저 멀리 미식축구부원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목표물, 루시안 맥은 그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우람한 덩치로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며 공을 던지는 모습은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베가스는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다리를 쩍 벌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기댄 채, 그는 마치 검투장의 황제라도 된 것처럼 훈련 중인 선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루시안의 등 뒤에 새겨진 등번호 ‘7’에 집요하게 박혀 있었다. ‘저딴 근육 머리가속으로 거친 욕설을 씹어 삼키는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질투라는 이름의 시커먼 불길이 그의 속을 태우고 있었다. 샤니아가 저런 놈과 프롬에 가는 상상을 하자,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훈련 종료를 알리는 코치의 호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땀으로 흠뻑 젖은 선수들이 헐떡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베가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찌그러진 물병을 벤치 아래로 툭 던져버리고는, 루시안이 있는 라커룸 방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복도는 후덥지근한 땀 냄새와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다. 베가스는 일부러 루시안의 라커 바로 옆에 등을 기대고 섰다.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시비를 걸기 위한 자세였다. 이윽고 헬멧을 벗어 든 루시안이 동료들과 시시덕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베가스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제 라커로 다가왔다. 철컥, 하고 라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Yo, Vegas. What’s up? (어이, 베가스. 웬일이야?)”

 

루시안의 목소리는 운동으로 상기된 탓인지 살짝 거칠었다.

 

베가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린 입술, 그리고샤니아가 혹할지도 모를 저 우직한 덩치. 베가스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애써 감추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Nothing much. Just came to see our star player. (별일 없어. 그냥 우리 스타 선수 얼굴이나 보러 왔지.)”

 

그는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루시안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키는 비슷했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다져진 루시안의 몸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베가스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루시안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 치며,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Heard you’re on the list. The prom list. (듣자 하니 네가 명단에 올랐다며. 프롬 파트너 후보 명단 말이야.)”

 

“Shania’s list. (샤니아의 명단.)”

 

그 이름 을 내뱉는 순간, 베가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루시안의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미소가 싹 가시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동료들과 나누던 농담으로 달아올랐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베가스는 만족했다. 자신의 말이 루시안의 뇌리에 정확히 박혔다는 증거였다. 그는 루시안의 어깨를 치고 있던 손을 떼는 대신, 오히려 손가락으로 그의 단단한 승모근을 꾸욱, 힘주어 눌렀다. 경고였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나 장난이 아니라는,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을 담은 무언의 메시지였다. 주변에 있던 다른 선수들 몇몇이 두 사람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듯,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 , . 베가스의 심장이 북처럼 울렸다.

 

“So, I’m gonna say this only once, so listen carefully, buddy. (그래서,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친구.)”

 

베가스는 루시안의 귓가에 거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서는 미식축구공의 가죽 냄새도, 흙냄새도 아닌, 오직 차갑고 서늘한 분노의 냄새만이 났다. 루시안의 커다란 덩치가 저도 모르게 살짝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베가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은 실전의 살기 앞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이 순진한 쿼터백은 아마 처음 깨달았을 것이다.

 

“Stay away from her. (그녀에게서 떨어져.)”

 

단호하고 간결한 명령이었다. 그 말에는 어떤 타협이나 협상의 여지도 없었다.

 

“She’s not a prize to be won on the field. And she’s definitely not for you. (그녀는 경기장에서 따내는 트로피 같은 게 아니야. 그리고 확실한 건, 네 것은 더더욱 아니지.)”

 

베가스는 루시안의 어깨를 꽉 쥐었던 손을 탁, 하고 거칠게 놓아주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이.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루시안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루시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당혹감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베가스가 뿜어내는 날 선 위압감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베가스는 그런 그를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If I see you anywhere near herI’ll make sure your football career ends before it even starts. (만약 내 눈에 네가 그녀 근처에서 보이기라도 하면네 미식축구 인생, 시작도 하기 전에 내가 끝장내 줄 테니까.)”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의 통보였다. 베가스는 더 이상 루시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깔끔하게 몸을 돌려 땀과 먼지로 가득한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그의발걸음은 더 이상 분노로 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만족감과 함께,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서늘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두 명의 경쟁자에게 확실한 쐐기를 박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샤니아의 선택뿐. 하지만 그는 샤니아가 결국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고, 아니,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스스로가 뿌려놓은 질투와 소유욕이라는 씨앗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자라날지 지켜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될 터였다. 그는 복도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씩 웃었다. 이제 공은 다시 샤니아에게로 넘어갔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하며 자신에게 돌아올까. 그는 유유히 다음 수업이 있을 교실로 향하며, 머릿속으로 샤니아와의 프롬 밤을 수백, 수천 번이고 그려보고 있었다. 춤추고, 웃고, 그리고 마침내

 

“Well, well. Look who it is. (이런, 이런. 이게 누구야.)”

 

다음 수업인 역사 교실로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에디 비글이었다. 금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그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베가스의 어깨에 팔을 척 걸치며 물었다.

 

“Heard you declared war in the chemistry lab and the locker room. Something fun going on that I’m not aware of? (화학실이랑 라커룸에서 전쟁 선포라도 했다며? 내가 모르는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에디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학교 내의 모든 소문은 에디의 귀를 거쳐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늘 그렇듯 로건 리퍼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로건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흥미롭다는 듯한, 혹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베가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베가스는 에디의 팔을 귀찮다는 듯 툭 쳐내며 웃었다.

 

“War? Don’t be so dramatic, Eddie. (전쟁? 너무 드라마틱하게 굴지 마, 에디.)”

 

그는 빈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기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Just a little pest control. (그냥, 작은 해충 구제 작업이었을 뿐이야.)”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운동장 한쪽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샤니아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잿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나 로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Pest control, my ass. You’re going to get yourself expelled one of these days, Vegas. (해충 구제는 개뿔. 너 그러다 언젠가 퇴학당할 거다, 베가스.)”

 

빈정거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베가스는 창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Don’t worry. I’m too pretty to get expelled. (걱정 마. 난 너무 예뻐서 퇴학 안 당해.)”

 

그는 턱을 괸 채, 여전히 창밖의 샤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샤니아가 고개를 들자, 창가 자리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베가스가 보였다.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붕붕 흔드는 모습이 그의 눈에도 비친다.

 

“Ve-ga-s-”

 

베가스는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건의 잔소리도, 에디의 시시껄렁한 농담도, 심지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역사 선생의 목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세상은 온통 저 아래, 운동장 한가운데서 햇살처럼 반짝이는 작은 금발의 인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정확히 자신을 찾아낸 그녀의 시선이 창문을 뚫고 그의 심장에 와서 박혔다. 이윽고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붕붕 흔드는 모습에, 베가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히죽 끌어올렸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로렌스와 루시안에게 으르렁대던 사나운 늑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 어쩔 줄 몰라하는 열여덟 소년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턱을 괸 채, 그녀의 입모양이 ---’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똑똑히 읽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베가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에 바싹 다가섰다. 그는 그녀를 향해 똑같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고는 부족하다는 듯,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과장된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외쳤다.

 

“My darling! (나의 달링!)”

 

그의 커다란 덩치가 창문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옆자리의 에디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Dude, you look pathetic. (, 너 진짜 찌질해 보인다.)”

 

로건의 냉소적인 한마디가 날아왔지만, 베가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샤니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번에는 양손 엄지와 검지로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그의 유치하고도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운동장의 샤니아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학생들 몇몇까지도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베가스는 오히려 더 신이 났다.

 

“She's waving at me! Did you see that? She’s totally into me. (그녀가 나한테 손 흔들었어! 봤냐? 완전 나한테 빠졌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에디와 로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들뜬 기분은 역사 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Mr. Vegas! Is there something outside more fascinating than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베가스 군! 로마 제국의 멸망보다 더 흥미로운 거라도 창밖에 있나?)”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베가스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듯,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는 선생의 눈을 피해 몰래 샤니아를 다시 한번 훔쳐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 하나에, 방금 전의 창피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베가스는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샤니아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After this class, meet me on the rooftop. (이 수업 끝나고, 옥상에서 봐.)]

 

💌 [Roger that! (분부대로!)]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짧게 부웅, 진동했다. 베가스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답장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역사 선생의 목소리는 이제 완벽한 배경음악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수업이 끝난 후, 옥상에서 샤니아를 만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무슨 말을 먼저 건넬까? 혹시라도 자신이 했던 유치한 하트 제스처를 놀리지는 않을까? 수만 가지 생각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일부러 교과서의 가장 지루한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잿빛 눈동자는 활자를 좇는 대신, 다가올 짧은 만남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반짝이고 있었다. 옆에서 에디가 뭐라고 속닥거렸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지금 그의 세상에선 그 어떤 것도 샤니아와의 약속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지루하기 짝이 없던 역사 수업이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베가스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거의 튕겨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이 어찌나 빨랐던지,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교실에 남아있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넘어진 의자를 발로 툭 차서 세우고는 가방을 둘러멨다.

 

“Someone’s in a hurry. (누가 좀 바쁘신가 보네.)”

 

로건이 팔짱을 낀 채 빈정거렸지만, 베가스는 그저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Got a date with destiny, my friend. (운명과의 데이트가 있거든, 친구.)”

 

그는 윙크를 한번 찡긋 날리고는 망설임 없이 교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복도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붐볐지만, 그의 커다란 덩치는 마치 물살을 가르는 상어처럼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는 그의 등 뒤로, 에디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Use protection! (콘돔 써라!)”

 

베가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가운데 손가락을 등 뒤로 높이 치켜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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